미국의 참전 병력은 다른 유엔 참전국의 파견 군대를 모두 합한 것의 몇 배에 이르는 규모였다. 미 육군은 제24사단, 제25사단, 제1기병사단, 제2사단, 제3사단, 제7사단, 제1해병사단, 제40사단, 제45사단 등 9개 사단과 2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수많은 지원부대를 파병했다. 미 육군은 전쟁 기간 중 최고 30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켰다. 1952년 유엔군사령부의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의 병력 수만으로 보면 지상군의 경우 한국군이 50%, 미군이 40%, 미국 이외의 참전군이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 육군이 시행한 작전은 사실상 6·25전쟁 전체 작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 해군은 극동해군의 통제 하에 제7함대가 주로 작전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항공모함,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및 지원함이 참여해 개전 이후 10일째 되는 7월 4일부터 북한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이후 미 해군은 공중폭격, 함포사격, 상륙병력 수송, 미 본토로부터의 인원과 물자수송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통해 고도로 숙련된 전투 능력을 보여 주었다.
미 공군은 극동공군의 통제 하에 제5공군과 전략폭격사령부를 중심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작전수행 능력을 고갈시키기 위한 폭격과 유엔 지상군이 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근접지원 작전을 펼쳤다. 미 공군은 전쟁의 초기단계부터 마지막까지 북한군과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혀 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