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국방/병무

조병창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국방부과학연구소 설치」(대통령령제922호, 1954. 7. 10) ; 「국방부과학연구소폐지」(각령제47호, 1961. 7. 15) ; 「국방과학연구소 설치」(대통령령제5267호, 1970. 8. 6) ;「국방부조병창 설치」(대통령령제6136호, 1972. 4. 12) ; 「국방부 조병창 폐지」(대통령령제10674호, 1981. 12. 31)
배경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출범했지만 병기와 장비는 2차세계대전 당시의 노후화된 미군 장비와 일본군이 남기고 간 99식 소총류가 전부였다. 그래서 당시 미군 철수로 전력증강이 시급했기 때문에 우리 군은 독자적인 조병과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했다.
내용
가. 육군병기공창의 설치
육군병기공창은 49년 1월 15일 옛 일제의 공장시설을 접수해 제1·2(이상 용산)·3(영등포) 공장으로 확대하고, 병기 부속품과 탄약부품 생산에 적합한 민간공장을 선정하여 계열 공장으로 운영했다. 임무는 군·경찰이 보유한 일제의 구식화기에 대한 정비지원과 탄약생산 업무의 수행이었다. 그들은 부족한 기술인력과 기자재를 임기응변식으로 보충하며 수류탄·99식소총탄·15㎏폭탄·지뢰·뇌관 등을 생산해 북한의 잦은 대남도발을 막는 데 기여했다.


육군의 공창은 49년 12월 15일 국방부에 병기행정본부가 설치되자 그 예하로 흡수됐다. 초대 본부장은 채병덕 육군소장이 맡았다. 본부의 기능은 병기의 연구개발과 각군의 병기행정업무를 통할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었다. 즉, 군 병기공장과 민간 병기생산 공장을 관할하고, 각군에 소요되는 병기·탄약·총기와 부속품 생산을 지도·감독하며 후송장비와 정비수리 등의 병기업무를 행정지원한 것이다. 


6개월 후인 50년 6월 15일 병기행정본부는 기구를 확대 개편하고 예하에 제1조병창(부산)과 제2조병창(인천)을 두고, 서울에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를 신설해 조병과 연구개발을 본격화했다. 행정본부는 각군과 경찰에서 파견한 대표로 운영위원회를 편성하고, 병기분야에 권위있는 사계 인사를 자문위원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10일 후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이동하여 제2조병창과 연구소를 서면에 위치한 제1조병창과 영도의 국립수산시험장에 분산 배치하여 업무를 보았다. 


그러다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52년 3월 19일 병기행정본부는 해체에 들어가 그 기능을 국방부 제5국(관리국)으로 이관했다. 제5국에서는 연구소와 제1, 2조병창을 관리했으며, 그해 11월 15일 2개의 조병창을 국방부조병창으로 통합했다. 휴전 후 국방부조병창은 서울로 이동했으나, 그해 10월 국무회의에서 인천공장(제2조병창→제주분창/제주작업소→인천 복귀)을 상공부로 이관하기로 결정해 기능이 축소됐다. 이후 국방부조병창은 54년 4월 1일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에 통합됐다. 


나. 국방부 과학연구소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는 54년 7월 10일부로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됐으나 55년 육군조병창이 생겨 연구개발 분야를 종래 병기·탄약에서 군용식량·피복, 유·무기재료, 원자력 이용, 로켓 등으로 전환했다. 연구소는 59년 7월 27일 1·2·3단 로켓발사시험에 성공했으며 13건의 발명특허도 획득했다. 그러나 61년 7월 15일 각령 제47호에 의거 국방부 과학연구소의 폐지가 결정, 8월 6일 해체되어 약 13년간의 업무를 종결함으로써 이제 조병·연구개발 업무는 그날 발족한 육군기술연구소에 흡수됐다. 이후 육군기술연구소는6·25 전후에 설치된 해군과학연구소·공군기술연구소와 함께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Aency for Defence Development)로 흡수돼 한국 군사력 건설사에 새 장을 열었다. 


다. 육군기술연구소
1961년 8월 6일부로 국방부과학연구소가 해체되면서 육군기술연구소가 발족했는데, 육군기술연구소는 육군병참기술연구소와 육군병기기술연구소를 통합, 발족한 것으로 1961년에 운영체계의 정립에 주력한 결과 그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들어갔다. 육군기술연구소의 조직은 과학부를 중심으로 한 연구분야 위주로 구성되었는데, 총 인력이 300명에 이르렀다. 육군기술연구소는 발족 후 비상식량, 열관리, 군용고무 및 플라스틱, 군용피복 등의 연구에 많은 실적을 남겼다. 1970년 3월 28일 창설된 육군전투발전사령부와 통합됨으로써 해체되었으며, 그 기능은 그해 4월 1일부로 육군연구발전사령부로 이관되었다. 육군기술연구소의 기능과 인력의 일부는 70년 8월 6일 설치된 국방과학연구소에 편입되었다.


라. 해군과학연구소
해군은 1951년 3월 23일 함정국 산하에 해군기술연구소를 창설한 바 있었다. 그해 8월 해군용 특수탄의 연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952년초부터 잠수함용 축전지의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51년 7월 수상항공기 제1호로 통제호가 제작됐고, 8월에 두 번째 수상함 제2충무공호가 건조되었다. 


해군기술연구소는 1952년 9월 참모총장 직속의 해군과학연구소가 창설되면서 그 부설기관이 되었다. 해군과학연구소는 55년 함정용 디젤기관 연구개발에 착수했으며 56년에는 수상항공기의 연구도 진행했으나, 58년 11월 15일 해체되었다. 


마. 공군기술연구소
공군은 1952년 11월 공군기술학교 주관으로 경비행기 설계 및 제작에 착수하여 시험비행에 성공하여 54년 4월 부활호로 명명했고, 그후 2대를 추가로 제작했다. 58년 3월 15일 제81항공수리창내에 공군기술연구소가 창설되어 보다 본격적인 연구개발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군기술연구소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미흡하고 미군원품 관리가 보다 시급한 과제로 등장했기 때문에 1963년 4월 1일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제81항공수리창의 기술연구실로 흡수되었다. 


바. 국방과학연구소 및 국방부 조병창
국방과학연구소(ADD)가 1970년 8월 6일 대통령령 제5267호로 국방부장관 소속하에 설치되어 국방과 관련된 과학기술의 조사연구를 수행했다. 그러나 71년 3월 4일 대통령령 제5545호로 폐지되었고, 그 이전인 1월 22일 대통령령 제5490호 국방과학연구소 시행령에 의해 법인체로 개편되었다. 


한편, 국방부 조병창이 1972년 4월 12일 대통령령 제6136호로 설치되어 국군이 장비할 소화기, 소총을 생산하기 위한 활동을 수행했는데, 이 기구는 1981년 12월 31일부로 폐지되었다.
참고자료
국방부,«국방조직변천사», 1992.
국방부,«국방부사»제1집, 1954.
국방과학연구소,«국방과학연구소약사»제1권, 1989.
국방군사연구소,«국방정책변천사 1945〜1994», 1995.
집필자
백기인(원광대 군사학부 외래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22
최종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