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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전사편찬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각령 제835호」(1962. 6. 23) ; 「각령 제1702호」(1963. 12. 16) ; 「대통령령제1904호」(1964. 8. 7)
배경
현대 국군의 발전과정에서 전사편찬에 관한 기능이 국방조직상으로 이루어진 것은6·25전쟁 중이었다. 비록 법제적인 과정이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국방부 정훈국 예하에 ‘전사편찬회’를 두어«한국전란1년지»를 비롯한 전쟁의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전후 전사편찬회는 해체되었지만 그같은 전사편찬의 전통은 1964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발족과 그후 1992년 1월 1일 국방군사연구소, 그리고 2000년 9월 1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로 그 임무와 기능이 유지, 발전되었다.
내용
가. 6·25전쟁초의 전사기록
1950년 7월초, 국방부에 전사계(戰史係)가 편성되어 공적인 전쟁 기록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전사계의 활동은 전쟁이 지연작전단계에서 유엔의 반격작전으로 전환되면서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전황이 회복되자 국가적인 차원에서 전사편찬의 필요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국방부는 1950년 10월부터 사계의 권위자를 망라한 본격적인 전사편찬의 업무를 추진했다.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 교수 이하 신도성(愼道晟)·이용희(李用熙) 교수를 위원으로 초빙하고 다시 사계의 소장학자 김원룡·한우근·전해종·정병학·민석홍 등을 역원으로, 그리고 정훈국의 박종식 소령을 책임장교로 배치하여 정식 기구로서 전사편찬회를 발족시킨 것이다. 


나. 국방부 전사편찬회의 발전
1951년 1월 전사편찬회는 정상적인 업무 수행에 들어갔다. 1월 15일 국방부 정훈국에서는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정훈공작을 강화하기 위해 기구를 확장하며 3과 3실 1위원회(행정실, 기획실, 편집실, 정훈과, 선전과, 보도과, 기획전문위원회)를 두고 장교 99명과 문관 514명으로 각종 선전대를 편성하여 대외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계의 권위자를 중심으로 한 전사편찬회를 두게 되었고, 종래의 3실을 과로 승격시켜 6과로 개편하는 한편, 행정과, 기획과, 지도과, 보도과, 조사과(얼마 후에 편집과로 바뀜)의 5과와 전사편찬회, 군사영화촬영소를 두어 그 업무를 활발하게 추진했다. 


다. 국군전사편술부의 활동
전사편찬회는 처음 발족할 당시부터 미 제10군단의 전사과와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업무·활동을 전개해왔다. 미 제10군단 예하에 국군전사편술부(ROKA Historical Section)를 설치하여 운영한 것은 국군의 전사편찬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국군전사편술부장은 현봉학(玄鳳學)이 맡았다. 


1951년 1월 17일 미 제10군단 민사부에 근무하고 있던 현봉학은 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편술부 조직구성에 착수하였다. 국방부의 정훈국장 이선근 장군의 동의가 있었고, 아울러 정훈국 전사편찬회의 이병도 위원장을 비롯한 제 위원들의 동의도 있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E. A. Almond) 장군을 비롯하여 전사관 옡우드(Atwood) 소령과 쇼트(Short) 소령의 제의와 한국군의 협조로 이루어진 연합활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렇게 미 제10군단 예하의 국군전사편술부는 미군과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다시 전사편술부는 그 상위기구로 국방부 정훈국의 전사편찬회와 연결되었다. 따라서 국군전사편술부는 미 제10군단 전사과(Historical section, G-3 작전참모 예하 소속)와 병행체제를 유지한 셈이었고, 미군은 미 제10군단 전사과 예하에 수개의 전사반(U.S. Hist. Team)을 운영했던 것이다. 


특히, 미 제10군단에서는 한인 전사관과 종군화가의 인선을 우리 정훈국에 의뢰했는데, 이에 전사편술부 인력은 현봉학 부장과 쇼트 소령이 대구와 부산으로 내려가서 현지에서 인선하였다. 그들이 바로 사학자로 한우근, 민석홍, 홍이섭 교수, 미술가로 이유태, 김인승, 장우성, 김흥수 교수와 화백들, 번역에는 장윤철, 박희영, 주태익, 홍덕희, 그리고 김성혜 등이었다. 그리고 미 제10군단 전사과와 병행체제를 유지했던 국군전사편술부 예하에는 전사반(ROKA Hist. Team)이 편성되어 활동했고, 국군의 전사반은 국군의 사단 정훈부 및 작전부에 소속되었다. 


라. 전사편찬회의 해체와 전환
1953년 8월 5일 전사편찬회는 국방부의 기구 개편을 통해 정훈부의 전사과로 개편되었다. 국방부가 정부의 임시수도 부산에서 소관업무를 수행하다가 수도 서울로 각 부처와 보조를 맞추어 8월초에 환도를 완료한 후 기구개편을 단행한 것이다. 이제 국방부의 제2국이 해군국으로 바뀌고 종래의 정훈국은 폐지되었는데, 정훈업무의 중요성에 비추어 장관직속으로 정훈부를 두었다. 그러한 정훈부에 영화과와 더불어 전사과 등 5과가 조직되었다. 정훈부의 조직으로서 전사과는 자료계(資料係)·전사계(戰史係)·부사계(部史係)로 구성되었다.


1955년 2월 25일 국방부 정훈부는 정부조직법의 공포에 따라 다시 국방부 정훈국으로 개편되었다. 그 무렵의 정훈국 편성표에 의하면 이제 전사과가 없어지고 일반교육과 내에 편찬계로 흡수 편제되었다. 이러한 조직편성은 실제로 국방부의 공식적인 조직으로서 전사편찬 부서가 해체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한국전란사의 편찬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국방부 내 전사편찬회는 국방부 정훈국 내에 임무정도를남겨두고 사실상 폐지되었던 셈이다.
 

이후 김성은 국방부장관은 북한의 대외선전활동에 대응하여 1963년말 ‘한국전쟁사’의 편찬을 위한 기구의 편성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64년 2월 다시 국방부에 전사편찬위원회(戰史編纂委員會)를 두어 ‘한국전쟁사(韓國戰爭史)’의 편찬을 목적으로 상설기구로 설치함으로써 한국의 전사편찬 활동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참고자료
«國防部本部 歷史日誌(1946〜1966)»(手筆本, 戰史編纂委員會 史料 No.35)
국방부,«국방부사»제1집, 1954.
백기인,<6·25전쟁기의 전사편찬과 운영체계>,«군사»제56호, 200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군사편찬연구소55년사», 2006.
집필자
백기인(원광대 군사학부 외래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8. 09. 22
최종 주제 수정
2008. 0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