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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제2종합제철 발족(1973)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73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1973년 대통령 제2종합제철 건설방침 공포(7. 3)

1973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대통령 지시(8. 22)

「철강공업육성법」(법률 제3181호)

「철강공업육성법 시행령」(대통령령 제5366호)

배경
1970년대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초 원자재인 철강의 자급이 절대과제였다. 나아가 중화학공업화를 위해서 철강재의 안정적 공급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에 정부는 제1제철로서의 포항종합제철이 완공되자 철강재의 자급자족, 국내생산강종(鋼種)의 확대, 기술과 시설의 근대화라는 정부의 철강공업육성 기본방향을 지속하기 위해 제2종합제철을 계획하였다.
경과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 대통령 연두기자 회견에서 제2의 종합제철공장 건설을 앞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1973년 7월 3일 박대통령은 제2종합제철 건설방침을 포항제철의 준공기념식에서 밝혔다. 이에 따라 7월 9일 제2종합제철 설립을 위한 전담기구 설립원칙이 결정되었고 이어 「제2종합제철소 설립추진위원회」가 포항제철 산하에 설치되었다. 8월 22일 박대통령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에서 제2종합제철회사를 주식회사로 상법에 의해 조속히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1973년 9월 17일 제13차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제2종합제철의 공식명칭을 ‘주식회사 제2종합제철’로 하고 회사설립을 10월 1일까지 하기로 결정하였다. 9월 17일 제2종합제철회사 설립을 위한 추진기구가 설치되었는데 여기에서 정책협의회(11명)와 회사설립 발기인 구성(8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준비 후에 9월 22일에는 제2종합제철회사 설립을 위한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10월 5일에 제2종합제철 타당성 조사용역 계약이 이루어졌는데 (1) 용역사는 U.S.S. Engineerss and Consultant 였고 (2) 용역비는 45.5 만 달러(이 중 38만 7천 달러는 미국 수출입은행에서 차관조달)였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따로 낙동강 하류, 충남 아산만(牙山灣) ,전남 광양(光陽)만 대상 입지 선정작업을 실시하였다.


1973년 10월 15일 제2종합제철 타당성 및 예비기술조사를 위한 U.E.C. 조사단이 방한하여 10주간 조사를 실시했다. 10월 17일 경제기획원에서 EXIM에 제2제철 차관을 신청하였는데 (1) 차관액은 386,750달러(85% 해당액), (2) 이자율은 년 6%(단, 미사용 잔액에 대한 0.5% 약정료가 있음), (3) 상환기간은 계약일로부터 1년 거치 3년 상환으로 하였다.


1973년 11월 8일 제14차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회의에서 「의안 1. 제2제철을 위한 타당성 및 예비기술용역 계약 보고」가 이루어져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이때도 여전히 입지선정은 확정되지 않았다. 11월 15일 제2종합제철 타당성 조사 용역 계약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1973년 11월 19일 제2종합제철주식회사가 임원 5인의 창립총회를 갖고 법인체로 발족하였다.

내용

정부가 마련한 철강공업육성의 구체적인 내용은 (1) 포항종합제철을 단계적으로 확충하여 1973년의 103만 톤 시설용량을 1976년까지 260만 톤으로, 다시 1979년까지 700만 톤으로 확충하는 것과 함께 (2) 제2종합제철소를 건설하여 초기 500만 톤 규모로 1980년까지 완공하고 최종적으로 1,000만 톤 이상 규모의 제2종합제철을 증설하는 것이었다. 제2종합제철소의 위치는 초기에 낙동강 하구나 아산만 지역으로 내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제1, 제2, 2개 제철소를 주축으로 한 기존 철강공장의 계열화 체계를 이룩하며 생산품의 전문화로 합리적인 철강산업을 육성한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항만, 용수, 철도, 도시토목, 주택 등의 사회간접자본부문의 지원과 더불어 원료, 기자재 도입에 대한 관세면제 및 원자재 차관 등 저리자금의 주선을 통해 금융비용을 최대한 줄이도록 했으며 생산원가를 낮추기 위해 운영면에서 각종 특혜조치를 강구토록 하였다.


신규철강공업의 건설 방향은 (1) 용광로의 대형화, (2) LD 전로(轉爐)에 의한 양산체제의 확립, 3) 연속주조법의 보급, 4) 압연설비의 고속정밀화, 5) 원료수송선의 대형화에 의한 수송비절감, 6) 국내생산 강종(鋼種)의 확대로 기술과 시설의 근대화 등으로 설정했다. 1974년 제2제철의 명칭을 「제2종합제철」에서 「한국종합제철」로 바꾸었다. 이후 합작사인 US Steel의 계속된 수익보장 요구와 포철의 공사연기 요구로 제2종합제철사업은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1975년 남덕우 경제기획원장관은 제2제철 건설계획 백지화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제2제철 사업주체인 「한국종합제철」은 「포항종합제철」에 흡수, 합병되었다. 1977년 현대가 제2제철을 맡겠다고 밝혀 재력있는 민간기업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과, 경쟁력을 위해 기술과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포항종합제철이 맡아야 한다는 논쟁이 계속되다 결국 포철로 최종 낙찰되었다.

참고자료

국무총리기획조정실,《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1973.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제14차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회의보고》대통령 보고문서, 1973.

이대환,《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현암사, 2004.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 제2권, 중화학공업정책사》, 1979.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朱民鎬, <韓國の重化學工業> 《<アジア公論》29, 1973.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