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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종합무역상사제도(1975)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75년 대통령 연두순시 대통령 지시

1975년 3월 수출진흥확대회의 종합무역상사 육성방안

1975년 4월 30일 상공부 고시

배경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한국의 수출이 1973년 오일쇼크 이후 세계시장에서 보호주의의 큰 장애에 걸리게 되었고, 원가상승으로 수출기업들은 위기에 몰렸다. 이렇게 1차석유위기로 수출에 큰 시련을 겪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기업과 상공부는 수출을 계속 확대시키기 위해 방안을 연구하였고 이 과정에서 상공부는 기존에 이미 검토된 바 있던 일본식의 수출종합상사가 시급히 도입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형 종합무역상사제도가 도입되었다.
경과

1968년 3월 14일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연합회」는 이사회를 열고 종합무역상사 설립구상을 채택하여 청와대, 경제기획원, 상공부, 재무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정부지원에 의해 대형 무역상사가 출현할 경우 기존 군소무역업체들의 타격이 클 것이라는 거센 반발이 있어 성사되지 못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 상공부는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발전모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수출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수출첨병으로서의 일본의 수출종합상사(총합상사 總合商社, 소고쇼오샤)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차 석유위기가 터지고 수출이 큰 시련을 겪게 되자 다시 삼성, 대우 등 대기업 수출업체들은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해 한국도 대형종합상사를 만들어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석유위기에 따른 수출비상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상공부는 이 건의를 받아 바로 한국실정에 맞는 한국형 종합상사를 만들기로 결정하였고, 1974년 10월 경 「삼성물산(三星物産)」과 「대우실업(大宇實業)」은 우리나라 종합상사 육성방안을 만들어 상공부에 직접 제출했다. 일부 대기업에게만 특혜를 주는 것이라는 반대여론 속에서도 상공부는 1975년 1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1978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이룰 수 있으며 그 방안이 수출을 대단위로 그룹화, 조직화하는 종합무역상사’라며 무역상사제도의 도입을 건의하였다.


수출을 지상주의로 하고 있었던 박정희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연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1975년 2월 15일 장예준(張禮準)상공부장관의 지시로 작업이 착수되어 완성된 내용을 3월 31일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종합무역상사 육성방안」으로 박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승인받았다. 상공부는 4월 30일 상공부 고시로 종합무역상사의 내용과 지정요건을 발표하였다.

내용

종합무역상사제도의 핵심내용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해외지사 10개 이상, 자본금 10억 원 이상, 50만 달러 수출 품목 7개 이상이라는 조건을 갖추면 종합상사로 지정된다.

둘째, 정부는 1978년 100억 달러 수출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모든 지원을 이들 종합상사에 한다.


즉 종합무역상사제도는 수출을 확대하기 위해 수출을 위한 전문 종합상사를 지정하고 이렇게 종합상사로 지정되면 정부가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 준다는 제도이다. 가장 먼저 삼성이 「삼성물산」으로 1975년 5월 19일 국내종합무역상사 1호로 등록하였고 이어 27일에는 대우와 쌍용이 종합무역상사로 등록했다. 이어 「국제상사」, 「한일합섬」이 1975년 말에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되었고 1976년에는 「효성물산」, 럭키금성의 「반도상사(半島商事)」, 「선경」, 「삼화(三和)」, 「금호실업(錦湖實業)」이, 그리고 1978년에는 「현대종합상사」와 「율산(栗山)실업」이 지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종합무역상사는 13개가 되었는데 이 중 중소기업 수출창구는 「고려무역(高麗貿易)」 한 군데뿐이었다. 종합무역상사는 1979년부터 「한일」, 「삼화」, 「율산」이 수출을 중단함으로써 1979년부터 10개로 되었다.


종합무역상사의 육성방향이 백화점식 물량확대 쪽으로 이루어지면서 대기업집단의 혼합결합에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 결과 종합상사 시행 후 4-5년간 혼합결합은 극에 달했는데 「삼성」, 「대우」, 「럭키」, 「현대」 등 모두 이 기간 각각 20여 개 기업을 인수, 합병 혹은 신설하였고 100여 개의 중소기업을 예속화시켰다. 이외에 「국제」, 「효성」, 「쌍용」, 「금호」, 「선경」, 「한일합섬」, 「삼화」, 「율산」 등 종합상사들은 석유위기(오일쇼크) 하에서 허덕이던 중소기업들을 인수하였다.


2006년 무역협회는 한국 무역역사 10대 뉴스를 뽑았는데 그 중 네 번째로 1975년 종합무역상사의 설립을 들었다. 종합무역상사는 부정적 영향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만큼 한국의 수출증대에 큰 몫을 담당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기업들의 계열분리로 그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참고자료

박영구, <1970년대 중화학공업과 경제력 집중> 《경제연구》 제21권제3호 한국국민경제학회, 한국경상학회, 2003. 9, pp. 207-232.

《서울경제신문》, 1979년 9월 21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William V. Rapp, “Form Size and Japan‘s Export Structure: A Microview of Japan's Changing Export Competitiveness since Meiji," Hugh Patrick, ed., Japanese Industrialization and Its Social Consequence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6, pp. 201-248.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