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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주한미군 철수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미국은 유엔에서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하고 유엔임시위원단이 선거 및 정부수립을 감독하며,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모든 외국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1947년 중국대륙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야기된 것을 계기로 미국의 소극적인 한반도정책은 주한미군 철수로 귀착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한 감군과 국방예산의 감축으로 인하여 지상병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947년 5월부터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했고, 그해 미 합동참모본부에서는 이를 정식으로 건의했다.

배경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 다시 파병되었고, 휴전 후에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1년후에 발효된 「한-미 합의의사록」에 근거하여 한.미동맹을 강화하면서 현 휴전상태인 정전체제를 관리해왔다. 그러나「닉슨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주한미군에 대한 철수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내용
가. 주한미군 철수논의
주한미군의 철수는 조선경비대의 증강 및 지원에 관한 조치와 동시에 검토되었다. 그것은 한국정부가 전쟁을 방지하도록 안보군(security forces)의 훈련과 장비를 지원하며 경제지원을 확대한다고 결정하는 것이었는데, 미군을 철수시키되 조속한 시일내에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한국을 지원하고 1948년 12월 31일까지 철수를 완료한다는 방침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NSC 8로부터 시작하여 이를 수정한 NSC 8/2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1947년 10월 미 육군부(Department of the Army)는 맥아더와 하지에게 한국군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하지는 그 달 남한에 사령부와 지원부대로 구성된 6개의 사단을 편성하고, 그 무기와 장비는 1년간 미군에 의해서 지원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맥아더는 한국에 국방군(Korean defense force)을 설치하는 것은 유엔 총회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는 연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4부조정위원회 실무단(SANACC working group)의 검토로 넘겨져 사실상 육군부와 공군 관련기관 사이를 선회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미국의 정치.군사 지도자들간에 남한의 국방군 건설과 관련하여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1948년 2월 8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 의한 ‘조선인민군(Korean People's Army)’의 창설을 전격 발표했다.

나. 주한미군 철수와 미군의 6.25전쟁 참전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4월 8일 미 국무부는 하지 중장에게 동년말까지 주한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도록 한국측과 제반 협정을 체결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한에서의 경비대 병력을 5만명 수준으로 증원하고, 미군 철수에 따라 자신들의 무기와 장비를 점차 이양시킨다는 조선경비대 증강계획을 추진했다.



이제 미 국무부는 1948년 말의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하고 한국의 경비대를 무장하고 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은 예정대로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949년 6월 30일부로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다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미군은 유엔군으로 한국에 참전하게 되었고, 그후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한반도의 전쟁억제를 위해 기여해왔다.


다. 한.미동맹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미군은 휴전 후 2개의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지상군 및 1개 비행사단으로 구성된 공군과 해군을 한국 내 주둔하기로 했으며, 그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하여 조속히 국군의 증강을 촉진한다는 방침하에 1954년 1월 23일, 미군 제40.45 등 2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1957년 5월 15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한국군현대화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육군의 장비 현대화 및 해.공군의 전력도 강화했다. 그리고 1958년 2월 11일 주한 미군의 현대화계획에 따라 주일 미군의 병력 일부가 한국에 증파되어 제1기갑사단으로 발족했으며, F-100 전천후 전투기 등을 한국에 배치하면서 전력을 보강했다.


그러나 1969년 7월 25일 괌(Guam)도에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은 “아시아에서 재래식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방위의 1차적 책임은 당사국이 져야 하며, 미국은 선택적이고 제한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닉슨독트린’의 선언이 있었다.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에 따라 주한미군은 휴전 이후 63,000명(실질 주둔병력은 58,000 내외)의 병력을 유지해오다가 1971년 3월 27일 미 제7사단 철수로 20,000명을 감축함으로써 병력은 43,000명 수준을 유지하게 되었다. 미국은 미 제7사단의 철수에 이어 한국에서 미 제2사단을 포함한 미 제1군단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라. 주한미군 철수 추진경과
한국정부는 미 제1군단의 계속적인 한국 주둔을 요청하였으며, 그 결과 양국은 1970년 10월 23일 육군본부와 미 제8군사령부간에 한.미군 병력을 동수로 편성하고 일부 예산을 한국정부에서 부담하기로 합의한 후에 통합군단인 한-미 제1군단(집단)사령부를 1971년 7월 1일 창설하게 되었다. 군단 예하에는 미 제2사단, 한국군 제6군단(제20, 26, 28사단과 제2기갑여단), 제1사단, 제25사단, 제2해병여단이 배속되었다.


주한미군 철수가 불가피하게 된 상황에서도 한국측은 당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전쟁억제에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위해 지난한 노력을 다했다. 그 결과, 미국은 한국 정부의 의사를 감안하여 이미 제10차 한.미안보협의회의의 합의에 따라 주한 미 지상군의 철수에 따른 보완조치로서 국제안보특별지원법안을 1977년 11월 의회에 제출했다. 이어 1월 19일에는 상하 양원합동회의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주한미지상군의 철수에 대한 대가로 한반도에서 적절한 무력균형이 이루어지도록 보완조치를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4월 6일에는 미 하원군사위소위는 미국의 주력지상 전투부대를 남북한이 정치적 타결을 볼 때까지 한국에 계속 주둔하도록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1978년내에 주한 지상군 6,000명을 철수시키되 그 대가로 제1, 2진 철수병력이 사용하던 8,000~9,000만 달러 상당의 장비를 한국군에 이양하는 것 등 6개항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마. 주한미군 철수계획의 수정
결국 1978년 4월 21일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철수계획에 따른 특별성명을 통해 미국이 대한방위공약을 유지함에 있어 확고한 결의를 재확인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적절한 군사균형과 주한미공군의 증강을 포함한 제반조치를 언급하면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수정했다. 이로써 주한미군의 비전투부대 재배치는 당초 일정대로 수행하되 1978년 철군대상 1개 여단 병력 6,000명을 1개 대대 전투병력 800명과 비전투요원 2,600명 등 3,400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1개 여단의 2개 대대병력은 1979년말까지 한국에 잔류하게 되었다.
참고자료

FRUS 1947~1949>, vol. 6.
「美軍駐屯에 關한 決議案」(1948. 11. 19),『제1회 국회속기록』제109호.
「駐韓 美軍撤收計劃에 따른 카터 美大統領聲明」(1978. 4. 21.)
《駐韓美地上軍 撤收에 관한 聽聞錄(Hearings on Review of the Policy Decision to Withdraw United States Ground Forces from Korea)》(<海外資料> 第48號, 國會圖書館, 1979)
Robert 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 KMAG IN PEACE AND WAR,Washington :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1962.
백기인,《건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집필자
백기인(원광대 군사학부 외래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