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과 일제시대의 도시계획의 변천사를 고찰하자.
가. 대한제국시대의 도시계획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개항 후 대한제국시대의 도시계획은 '치도사업'으로 대표되는 도로의 개량을 통한 도시의 정비로서 나타나게 된다. 치도에 관한 논의는 1882년 말 박영효 등의 일본수신사일행이 동경에서 김옥균으로부터 치도약칙(治道略則)이란 글을 받아와 이를 치도규칙(治道規則) 이라는 소책자로 내면서 전개되었으며 이는 갑오개혁이후 대한제국시대의 한성부도시개조사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치도사업에서 우선적 주요과제는 기왕에 정도 초기부터 넓게 확보되었던 오늘의 종로나 남대문로 등이 그동안의 무분별한 가가(假家 )의 침범으로 인하여 좁혀졌던 것을 회복하며 가로변의 경관 및 청결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이에는 크게 세 가지 사항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
첫째는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하며 경운궁(덕수궁 )을 중수하며 본궁으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황제권의 회복을 주창하며 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 고종이 이를 중심으로 한 가로의 정비 및 시설의 배치를 도모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둘째는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정동일대가 외국인들의 공사관등의 시설이 밀집된 지역으로서 이들의 필요나 요구 지적도 많았으리라 예상되며 치도사업의 시작에서 보여진 것과 같이 조약국인 외국에 대하여 위신을 높이려는 목적도 작용하였으리라는 보는 것이다.
셋째는 개항 이래 우리나라에서의 주도권장악을 위하여 경쟁하던 청‧일 양국의 관심은 서울의 경우 남대문로(상권)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이 된다. 이 시기의 도시개량사업에서 등장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시민공원의 등장이다.
나. 시구개정시기(1910 년대)시구개정은 식민지화 초기의 도시계획으로 공식적으로 1912년에 시작하여 1929년까지 계속된다. 이는 가로의 직선화, 확폭, 신설 등 가로정비를 주로 하는 것이다. 1929년까지 사업이 지속되나 그 면모의 전체적인 것은 대체로 1910 년대에 이루어진다. 소위 무단통치시기에 이루어진 도시계획이다.
다. 소위 도시계획운동시기(1920 년대)소위 문화정치의 시행과 더불어 대두된 자치제의 실시운운에 힘입어 전개된 각 도시마다의 도시발전을 위한 도시계획수립을 위한 준비, 연구의 시기로서 이들이 직접 법적인 효력을 갖는 도시계획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것들이 결국 그 다음의 1934년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한 시가지계획수립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
라. 시가지계획의 시기(1930 년대)1934년의 ‘조선시가지계획령’의 공포를 기화로 1910년대부터 시행되어 오던 시구개정사업이 시가지계획으로 대체되던 시기이다.
1940년 12월18일 일부개정 조선총독부제령 41호
1943년 3월 31일 일부개정 조선총독부제령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