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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안보국방과 미국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유엔 감시 하의 자유총선거에 의해 탄생한 신생 대한민국의 안보국방 분야에서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가는 미국이었다. 미국은 194911일 한국을 정식으로 승인했다. 그 이후 미국은 500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겨두고 철군을 단행했다. 이승만대통령은 대북한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과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해주고 대규모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용
                                                                                      

이승만대통령은 194988일 장개석 총통과 정상회담을 갖고 태평양동맹 결성에 관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 정상은 공산주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언명했다. 그러나 1949820일 트루먼대통령은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내 서한에서 한국이 대규모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한국경제에 커다란 부담이 될 것이기 때문에 소규모의 효율적 군대를 발전시키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1950112일 애치슨국무장관은 그 유명한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된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이 연설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한국을 방위할 의도가 없다는 것으로 오해되었다. 그렇지만 이 연설에서 애치슨은 한국이 남침을 당할 경우 유엔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과 사전 공모하여 남침을 강행했을 때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안보리에 상정하게 된다. 이승만정부는 미국과 유엔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미국과 유엔의 군사적 개입으로 인하여 북한의 적화 야욕은 좌절되었다. 중국군 개입 이후 전선이 38선 근처에 고착되었을 때 유엔은 공산측에 대해 휴전을 제의했다.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이 미온적 태도로 나오자 이승만대통령은 반공포로 27천명을 석방하고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하여 싸울 것을 선언했다. 이승만의 강경한 입장에 직면하여 미국은 한국이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확약을 받은 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해 주었다. 한미방위조약 체결은 이승만 외교의 가장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한미군사동맹을 통하여 한국은 안보적 측면에서 대북 억지력과 대외적 안정감을 확보함으로써 경제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51710일 개성에서 시작된 휴전회담1953727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만2년에 걸쳐 159회의 본회담과 765회의 각종 회담을 개최했다. 휴전협상 과정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들은 군사분계선 설정문제, 외국군의 철수 문제, 정전감시위원회 설치 문제, 포로 송환 방식 등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은 1952127일 현 접촉선으로 하기로 양측이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양측은 비무장지대에서 군사 활동을 감시할 군사정전 위원회 설치에 합의했다. 또한 많은 논란을 거쳐 후방 지역에서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할 중립국 감시위원단 설치에도 합의했다. 중립국 감시위원단으로는 양측이 스위스, 스웨덴, 체코, 폴란드 4개 국가로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가장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던 포로 송환문제는 예상과 달리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휴전협정 체결을 1년 넘게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엔군측과 공산측은 포로송환 원칙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유엔군측은 포로가 돌아갈 국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발적 송환원칙을 주장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 중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을 경우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이와 반대로 공산측은 포로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본국으로 반드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강제적 송환원칙을 내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들이 자유의 품으로 안기지 못할 것을 우려하여 1953618일 미국과 유엔의 반대를 무릅쓰고 2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시켰다. 이 조치는 반공포로를 자유의 품으로 데려오기 위해 취해진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훌륭한 외교 업적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한국은 한반도 상에서 공산세력이 또 다시 남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방안의 하나로서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에게 상호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휴전협정 과정에서 반공포로 석방과 같은 수단을 이용해서 한국의 협조 없는 휴전협정 체결은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이승만대통령의 단호한 자세에 놀란 미국은 휴전협정을 빨리 체결하고 한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국과 상호군사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한미상호군사방위조약과 주한미군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안정과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참고자료
                                                                                      

외교통상부,한국외교 40, 1990

외교통상부,한국외교 50, 1948-1998, 1999

김정원,한국외교발전론집문당, 1996

집필자
김영호(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