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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국내정치와 미국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 정부가 무너진 뒤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내각을 거쳐 19608월 제2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2공화국 헌법은 제1공화국 당시 대통령에 지나친 권력집중이 이루어졌다는 인식 아래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정부 운영의 실질적인 책임과 권한은 총리가 맡고,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직위가 되었다. 2공화국의 총리에는 민주당 신파의 장면, 대통령은 민주당 구파의 윤보선이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내용

1. 1960-1961

장면정부 시기의 국내정치는 상당한 불안정성으로 특징 지워진다. 4·19혁명 이후 분출되어 나오는 사회적 요구들을 수용하기에는 장면총리의 리더쉽이 너무 약했다는 것이 불안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민주당의 분열과 같은 정치적 요인도 작용하였다. 그러나 사실 출범 직후부터 장면 정부는 환율현실화 및 공공요금 인상 등과 같은 경제개혁조치의 완수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개혁조치는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으로 미국정부가 요구한 것이었다. 여하튼 이러한 조치들로 인해 장면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더욱 고조되었으며, 장면의 리더쉽을 보다 강화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미국 정부 내에서도 대두되었다.

 

2. 1961-1972

미국은 1960년대에 발생한 한국의 중요한 정치변동과 사건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의혹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항상 한국의 정치변동에 개입하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직접적인 지원없이는 국가로서의 생존을 도모할 수 없을 정도로 의존적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개입은 직접적 개입뿐 아니라 불개입조차도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19615·16이 발생하자 이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였다가 이후 민정이양을 위해 강한 압력을 행사하였다. 이후 1964년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로 비상계엄이 내려지게된 6·3사태 당시에는 김종필의 축출을 꾀하는 한편 한일회담을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65년 이후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진 가운데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한국내정에 대한 영향력과 개입의 정도를 낮추고자 한다. 이러한 가운데 박정희의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이 추진되자 미국은 다시 관망의 태도를 취한다.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17. 12. 26
최초 주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