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한국군은 북한군에 맞서 용맹스럽게 싸웠지만 북한군의 계속적인 남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북한군의 침공에 대한 유엔의 최초 조치는 6월 25일 안보리결의(UNSCR 82호)였다. 이 결의에서 유엔은 북한군이 침공을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6월 27일에는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유엔 회원국들이 지원해 줄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UNSCR 83호)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는 유엔의 한국전쟁 개입에 대한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후 1950년 7월 7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유엔 전투부대들이 하나의 군사기구로 통합하는 결의(UNSCR 84호)를 지지하였으며, 이 결의에 의해 미국은 안보리 결의 이행 및 한국에서의 유엔군 활동을 지휘하는 국가로 지명되었다. 회원국이 제공한 군대와 지원에 대한 원활한 운용을 위해 미국주도 통합군사령부 창설과 사령관 임명, 통합군사령부에 유엔기 사용권한을 부여 받았으며, 1950년 7월 24일 역사적인 유엔군사령부가 일본 도쿄에서 창설되어 한국전 참전 16개국과 한국군을 작전지휘하였다.
유엔의 지원 하에 통합된 다국적군은 전투병력을 파견한 미국, 호주, 벨기에, 캐나다,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터키, 영국 등 16개 국가와 의료지원을 제공한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노르웨이, 스웨덴 등 5개 국가로 구성되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치열한 전쟁 중 하나로서 낙동강, 인천, 장진호, 지평리, 가평, 백마고지, 피의능선, 도솔산고지 전투 등 세계 평화를 위해 공산침략자들 격퇴하고 유엔군의 용맹을 증명한 전사에 길이 남을 전투기록을 남겼다. 6·25전쟁 기간 중 유엔군 전사자 5만여 명을 포함하여 총 16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공산침략자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한국의 자주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16개 유엔참가국들은 전쟁 재발 시 신속히 지원할 것을 1953년 7울 27일에 유엔본부에서 결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