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금융
1970년대 통화금융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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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설명
배경
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가 연평균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한 결과로 1960년대에는 경기과열과 물가상승 현상이 심화되었다. 정부는 우리 경제의 안정성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1969년 말부터 경제안정정책을 실시하였고, 통화금융정책도 이 기조에서 운용되었다. 경기과열 현상은 경제안정정책으로 진정되었으나,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적으로 국제통화제도의 불안이 나타나고 국내적으로 기업재무구조가 악화되고 국제경쟁력이 낮아지는 등경제상황이 급격히 악회되었다. 정부는 1972년 8월 이른바 8.3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하여 사채의 정리, 은행 단기대출금의 장기저리대출로의 전환 등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구조개선대책을 제시하고, 이를 계기로 사금융을 제도금융에 흡수하는 동시에 금융구조를 다변화하는 조치를 강구하였다.
정부는 1972년의 구조개선정책이 성과를 거두기도 전에 중동전쟁을 계기로 하는 제1차 석유파동이 1973년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경제는 경기침체, 물가급등, 경상수지 적자 확대 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정부는 1974년 1월 ‘국민생활안전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단행하면서 자금수요를 억제하는 동시에 자금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통화금융정책도 함께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기침체가 더 심화되어 정부는 1974년 특별경제조치를 단행하여 국제수지의 개선과 경기회복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1973년부터 경제성장과 수출신장의 한계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돌파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74년에는 국민투자기금을, 1976년에는 한국수출입은행을 설립하여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금융기관의 대출도 중화학공업에 자금이 우선적으로 지원될 수 있게 시행되었다.
1970년대 하반기에 선진국 경기가 회복조짐을 보이고 우리나라 경제도 1976년부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수출은 1977년에 1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중동수출 호조에 따른 국제수지 개선으로 국내경기가 과열되고 부동산투기도 심화되었다. 정부는 1978년부터 물가안정에 역점을 두고 총수요관리를 강화하였다. 통화금융정책도 이에 따라 긴축으로 선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경기는 계속 상승세를 타면서 더욱 가열되자 정부는 1979년 5월에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발표하는 것을 계기로 경제안정정책을 추진하였고, 통화금융정책도 이에 조응하여 긴축기조를 강화하였다.
내용
1970년에 접어들어 국제통화의 불안 속에서 선진국의 경기침체와 보호주의 강화됨에 따라 정부는 1971년에 안정기반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금융기관의 여수신금리의 인하, 지급준비율의 조정, 선별적 금융지원 강화 등 금융완화책을 시행하였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고도성장은 자본축적이 빈약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제도금융권의 자금공급도 미흡하여 기업의 고금리사채 의존이 심화되어 재무구조도 악화되고 기업의 대외경쟁력도 악화되었다는 판단 아래 기업의 원리금 상환부담을 줄여주고 기업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기 위해 정부는 1972년 8월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공포하였다. 정부는 이 조치에서 기업의 사채를 새로운 채권채무관계로 조정하고, 기업의 고리의 단기대출금을 저리의 장기대출금으로 전환해 주고, 신용보증기금을 새로 설립하여 중소기업에 대한 보증을 확대하고, 산업합리화기금을 설치하여 기업의 산업합리화를 금융적으로 지원하였다. 정부는 이 조치와 함께 금융기관의 금리를 대폭 인하하고, 환율을 1달러당 400원 정도로 인상시키고 물가상승률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정부는 8.3 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하면서 사채시장을 정리하는 동시에 이를 제도금융권으로 흡수하기 위해 단기금융업,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하였다. 단기금융업법 제정으로 한국투자금융회사 등 단기금융회사가 설립되어 1970년 말에는 이러한 종류의 금융기관이 15개에 이르게 되었다. 상호신용금고법에 근거하여 서민금고 및 사설무진을 담당하는 상호신용금고가 새로 탄생하였고, 신용협동조합법에 근거하여 신용협동조합, 마을금고, 농수협상호금융 등이 탄생하였다. 정부는 1974년 증권투자를 대중화할 목적으로 증권투자신탁전업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의 채무보증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신용보증기금법을 제정하였고 이에 따라 1976년 신용보증기금이 출범하게 되었다. 정부는 1975년에는 민간차원의 중장기상업차관 도입을 목적으로 종합금융회사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근거하여 1976년에 한국종합금융이 처음 설립되었고, 1976년에는 자본재수출과 해외투자 및 해외자원 개발을 전담할 금융기관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특수은행으로서 한국수출입은행이 설립되었다.
정부는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위해 1972년 12월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법을 개정하여 상장회사 및 공개법인에 대한 우대조치를 확대하고 증권회사의 대형화를 추진하여 자본시장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장은 제1차 석유파동으로 일시 위축되었으나, 1974년 대한금융단이 계열기업군의 기업공개가 부진할 경우 금융지원을 제한한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계열기업군에 대한 여신관리협정’을 체결하여 시행하고 증권투자신탁전업회사가 출범하면서 자본시장이 다시 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중화학공업의 지원에 필요한 내자를 효과적으로 조달 공급하기 위하여 1973년 12월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이 기금은 국민투자채권의 발행, 정부로부터 전입 또는 예탁으로 조성된 자금을 금융기관을 통해 중화학공업 등 국민투자기금법에서 정하는 중요산업에 융자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정부는 1973년 중화학공업건설계획과 우리경제의 장기전망(1972-81)을 발표하면서 중화공업 육성방침을 천명하고 재정 금융적으로 지원제도를 확립하였다.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위한 지원은 1974년 국민투자기금이 설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정부는 국민투자기금 이외에 특수은행을 통해 중화학공업에 저리자금을 공급하는 우대조치를 취하였다. 한국은행, 한국산업은행이 선별금융지원체제를 확립하고 중화학공업을 금융지원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중장기연불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1976년 수출입은행을 설립하였다.
정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한국은행과 협력하여 금융기관의 건전화 또는 경영정상화에 노력을 기울었다. 특히 금융단 협정에 의거 기업합리화위원회를 설치하고 부실채권 회수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다 정부는 1973년부터는 금융기관의 경영합리화 근본대책으로 시중은행의 민영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한국은행은 1973년 8.3조치를 계기로 금융기관의 경영환경이 다소 개선됨에 따라 새로운 여신방식을 개발하고 정책금융의 지원체제를 재정비하여 금융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1973년 10월 중동전쟁을 계기로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산유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경기침체 속에서 물가고를 겪게 되었다. 우리나라 정부도 물가폭등과 경기침체에 대응하여 1974년 1월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단행하면서 성장보다는 안정을 중시하는 긴축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조치에서 재정 금융면에서 총수요억제정책이 추진되었다. 재정면에서 재정투융자를 비롯한 정부지출을 억제하였고, 금융면에서 은행여신을 억제하되 생산성이 높은 부분에 자금을 중점 지원하고자 금융기관 선별융자준칙을 마련하여 실시하였다. 1974년에는 시중유동성을 저축으로 흡수하기 위해 저축성예금 금리를 인상하고 종합가계예금 등을 신설하였다.
1976년에 접어들어 세계경제가 확장국면에 접어들어 우리나라 수출신장이 급속해지고 경기도 회복세를 보였다. 정부는 안정을 저해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확장기조로 선회하고 수출지원 및 중소기업지원을 위한 정책금융을 강화하였다. 1976년에는 수출신장세가 지속되고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루는 등 경기가 회복되자 기업의 금융비용을 낮추기 위해 1977년 7월 여수신금리를 인하하였는데, 그 해 하반기부터 경기가 과열되면서 물가불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8년에 접어들어 정부는 기대인플레이션 상승, 부동산투기 만연 등에 대처하여 총수요관리를 강화하고 수입자유화조치를 실시하였다. 한국은행은 이러한 정책기조에 부응하여 1978년 금융기관 지급준비율을 높이고 6월에는 금융기관 여수신금리를 인상하고 8월에는 ‘금융기관 대민간 신용한도 관리규정’을 제정하여 대민간신용관리를 제도화하였다.
1979년에 접어들어 제2차 석유파동이 시작되면서 국제유가가 급속히 상승하여 인플레이션 우려가 증대하였다. 정부는 총수요를 관리하고 통화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수출과 투자에 대한 전략을 재검토하는 동시에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이 조치는 생활필수품 수급을 원활히 하고 관세인하 등을 통해 가격을 안정시키고, 재정긴축을 통해 재정수지를 개선하여 통화환수를 추진하고, 정책금융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정부는 정책적 필요성이 적은 자금을 일반자금은 금융기관에 자율적 운용에 맡기되, 장기시설자금 및 장기운전자금을 공급하는 민간 장기 설비금융기관으로서 한국장기신용은행을 설립하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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