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은
11월 3일의 다소 우발적인 시위가 11월 12일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투쟁으로 연결되고, 이어 점차 인접지역인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12월에는 서울에서의 학생시위로 연결되는 등 전국의 149개교 학생이 참가한 일제시대 대표적인 반일학생운동이다.
광주에서의 민족간 학생 충돌이 전국적인 대규모 반일투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선
운동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11월 3일 역전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학생들은 광주일보사를 습격하고 광주역전에서 일본인 학생들을 타격한 후, 약 300명이 대오를 형성하여 광주시가지를 돌며 구호와 운동가를 부르면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에 일제는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한국학생 75명을 구속했다. 일제의 조치에 분노한 학생들은 11월 12일 제2차로 다시 봉기하여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석방'과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고 그 결과 다시 약 400명의 학생이 경찰에 구속당했다.
그리고 시위는 서울로 확산되어 12월 2일 밤 서울시내의 경성제대, 제 1고보, 보성고보,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에 수천 장의 격문이 살포되었고, 이를 계기로 5일부터 13일까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특히 9일에는 서울의 모든 중등학생들이 격렬한 시위에 나섰고, 이날 하루에만 1,200여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격문의 내용 및 시위 구호는 ‘검거자 석방’,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식민지노예교육제도 철폐’,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획득’, ‘전국학생대표회의 개최’ 등 이었다.
반일 시위운동이 점차 확산되자 일제는 조기방학을 실시하고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1월 15일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부터 1930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참가한 학교는 194개교, 참가한 학생수는 약 5만 4,000명에 달했다. 그리고 항일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 학생은 582명, 무기정학은 2,330명, 피검거자는 1,642명에 이르렀다.
항일광주학생운동은 조선의 독립, 식민지교육의 반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획득 등을 목표로 전개된 민족운동이나 무엇보다도 학생들이 가장 절실하고 구체적으로 느끼며 싸워 얻고자 한 것은 차별없는 교육, 민족주의 교육의 실현이었다는 점에서 일제시대 대표적인 교육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