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대통령의중화학공업화 선언 내용
1973년 중화학공업육성계획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
1973년 상공부 「장기조선공업진흥계획」
1973년 3월 29일 대단위 조선공업기지 건설계획이 확정되었다. 조선공업기지 건설계획은 3개의 지구에 대해 이루어졌는데 안정(安井)지구는 1976년 취소되었으므로 2개 지구에 대해 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가. 옥포(玉浦)지구
1) 구역면적: 1,206천 평
2) 공업용지: 971천 평
3) 항만: 방파제 1,300m
4) 도로: 충무(忠武)-옥포(玉浦) 도로 개수(폭 10m)
5) 공업용수: 4천 톤/일 공급 시설
6) 동력: 순천(順天)변전소(154KV)에서 연결
7) 조성면적: 235천 평
8) 계획인구: 약 2만명
나. 죽도(竹島)지구
1) 구역면적: 923천 평
2) 공업용지: 561천 평
3) 도로: 기지내 통과도로 이설
4) 공업용수: 4천 톤/일 공급시설
5) 동력: 옥포조선소 인입선에서 분기
6) 조성면적: 362천 평
7) 계획인구: 약 1.5만 명
정부는 조선공업이 공해없는 조선공업이므로 공업기지에 내외국인에 필요한 주택시설, 복지시설 및 문화시설과, 조선공업을 위한 교육기관, 조선기술연구소 등을 설립하고 필요한 교통망을 확장하여 레크리에이션 센터로도 개발할 계획을 세웠다. 옥포조선소를 위한 1,385미터의 방파제가 1974년 시작되었고 충무시와 거제조선소를 연결하는 46.3km의 기존 도로가 개선되었다.
1976년 조선소 건설 계획이 조정되었는데 옥포조선소의 건설공기가 1973.10-77.6에서 1973.10-77.12으로, 죽도조선소의 공기가 1974.12-76.9에서 1974.12-77.6으로 그리고 안정조선소는 포기되었다. 1976년 10월 27일 「옥포(玉浦)조선소」는 독일 Krupp사와 900톤 골리앗(Goliath)크레인 구매계약을 DM 11,464,400에 맺었지만 이후 점점 사업이 지지부진해졌다. 1978년 3월 박대통령은 해사졸업식 참석후 건설중단된 「옥포조선소」의 계속건설을 지시했다. 1978년 8월 31일 「경제장관협의회」에서 「조선공사」 투입분 138억 원은 현금결제하고 산업은행이 319억 원, 그리고 「대우」가 319억 원 이상 출자하여 「옥포조선소」를 대우그룹에서 인수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옥포조선소를 중공업단지로 한다는 원칙을 결정하고 9월 26일 「옥포조선소」 건설 주체로 「대우조선공업(주)이 설립되고 11월 「경제장관협의회」에서 옥포종합기계공단화 계획을 승인하였다.
조선공업기지의 건설로 1978년 말 한국의 조선능력은 약 280만 톤으로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고 1980년 삼성조선소의 1차 준공으로 시설능력은 2,800천 G/T에 달하게 되었다.
국무총리기획조정실,《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1973.
대통령비서실장,《기안용지: 대통령각하 지시사항 시달》대비정 100-141, 1973. 7.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중화학공업 추진현황》, 1979.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 제2권, 중화학공업정책사》, 1979.
한국무역협회,《무역자유화를 위한 주요품목별 국제경쟁력 평가조사(Ⅱ) 품목자료》조사자료 83-35, 1983.
Planning Office, Heavy and Chemical Industry Promotion Counci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avy and Chemical Industry,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