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중화학공업육성계획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
1973년 9월 9일 박정희대통령 지시
1973년 「장기기계공업육성계획」
영남지역내 입지 중에서 창원지역이 내륙형 공업인 기계공업이 입지할 수 있는 조건의 적합지구로 뽑혀 기계공업단지로 선택되었다. 이에 따라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의 기본방안이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가. 규모를 대형화하여 국가계획 및 관리로서 대량생산이 가능토록 한다. 즉 대단위 단지계획으로 소재, 부품, 제품 등을 구분하여 전문공장의 설치와 기술의 집중화를 꾀하도록 한다.
나. 소재공장군, 부품공장군, 제품공장군을 종합단지내에 두고 몇 개의 지구로 블록화하여 구분 설정한다.
다. 위의 세 가지 공장군은 공정별, 품종별로 구분하여 단일공장을 설치하며 각 공장은 업종별로 적정규모를 설정하되 설비규모는 되도록 대형화함과 아울러 설비는 최신의 기계시설로 구비한다.
1973년 9월 9일 박정희대통령은 창원기계공업단지 건설을 조속히 시행하라고 지시했고 9월 10일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1973년 10월 11일 상공부장관은 「기계공장건설(증설포함) 실수요자 선정 및 지원요령」(상공부 고시 제7552호)을 발표하였다. 1973년 11월 19일 마침내 창원기계기지가 착공되었으나 기지내 주민 철거 문제로 갈등이 있어 공사가 진행되지 못했다. 해를 넘겨 1974년 2월 4일 문제가 해결되어 1981년까지 1,120억 원을 투입하여 총 460만 평 기계공업기지를 조성하기로 하고 「창원종합기계공업기지」가 1차 착공되었다. 1974년 4월 17일 「한국기계공업공단」이 창원에 정식 발족되었고 1975년 7월 1일 상공부고시 제7901호 「창원기계공업기지 공장건설 실수요자 선정 및 지원요령」이 공고되었다.
창원기계공업단지의 목표는 1981년 국내기계공업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는 48억 달러를 생산하며 그 중 14억 달러를 수출하는 것이었다. 창원공단의 공장설치 방법은 내륙형과 임해형으로 크게 나누고 입지단위, 공장별로 분업과 협력체제를 쉽게 이룰 수 있도록 기능별로 배치하였다.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창원공단을 1차 완공하자 1976년 기업들이 ‘창원러시’가 이루어졌다. 외국인 투자가들도 초기 완공에 깊은 인상을 받아 외자도입이 급증하였고 직접 합작투자도 늘어났다. 1975년 입주업체는 38개 업체에서 1976년 52개, 1977년 88개, 1978년 122개 업체로 늘어났다. 특히 1977년 대기업집단 관계 기업들의 입주러시가 있었다. 1978년에는 “창원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지 마라”라는 말이 유행했다.
1979년 말까지 창원기계공업단지 조성전체사업비 46,112백만 원 중 약 46%가 투자되었다. 1979년 창원기계공업단지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가. 규모(만평)
총면적 645.0만 평, 분양가능지 419.0만 평, 분양지 418.5만 평
나. 입주기업
입주기업 121개, 가동업체 65개, 건설 중 20개, 미착공 33개 업체
다. 고용
계획 50,000명, 현재고용 30,100명
라. 생산액
450,616백만 원
마. 수출액
16,546.6만 달러
창원기계공업단지는 국가산업발전의 기초산업이며 중핵적인 소재(素材), 요소(要素), 산업기계, 수송기계, 정밀기계, 전기기계 등 핵심기계 부문을 유치함으로써 창원기계공업단지의 건설에 의한 기계공업의 육성이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국무총리기획조정실 평가교수단,《제4차경제개발5개년계획 3차연도 평가보고서: 제2편 산업부문》, 1980.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우리나라의 중화학공업화정책(해설)》, 1973.
동남지역공업단지관리공단,《중화학공업의 시작과 미래: 동남공단 20년사》, 1996.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 제2권, 중화학공업정책사》, 1979.
창원기계공업공단,《창원기지 5년사》,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