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중화학공업육성계획
1973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의 비료공장 마스터플랜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선언에 따른 공업구조 개편론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여수광양만(麗水光陽灣) 지구에 내외자 총 4억 8,800만 달러를 들여서 연산 100만 톤 이상의 비료공장을 1977년 2월까지 완공한다고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제7비료」 공장건설계획이었다. 상호는 「남해화학(南海化學)」으로 정해졌다.
1973년 4월 16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는 「호남종합화학기지」내 화학공업계열공장 선발사업으로 「제7비료」 건설계획을 확정하였다. 그 내용은 연간 암모니아 49.5만 톤, 요소 23만 톤, 황산(黃酸) 66만 톤, 인산(燐酸) 20만 톤, 복합비료 60만 톤, 질산 4.5만 톤, 연초비(煙草肥) 7만 톤, 초안(硝安) 1.5만 톤 등 8개 품목을 1977년부터 생산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장기수급계획이었다.
1973년 5월 10일 「한국종합(韓國綜合化學)(株)」 내 3개 기술부, 1개 행정지원부, 인원 48명으로 「제7비료」 건설추진본부가 발족되었다. 5월 16일에는 「제7비료」 건설을 위해 「한국종합화학」 소유의 「한양화학(韓洋化學)」, 「한국카프로락탐」, 「한국메탄올」, 「제3비료(肥料)」, 「제4비료」 주식 매각방침을 확정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7월 「7肥건설추진기구」는 공장건설 입지 선정 및 마스터플랜 용역계약을 KEC와 체결하고 일본 UNICO와 사업타당성 조사용역 계약을 체결하였다. 8월 28일 「제7비료」 입지를 전남 여천(麗川)지구로 결정하였다.
전남 여수, 광양만을 선택한 이유는 (1) 인접 「호남석유화학기지」 내에서 원료수송이 간편하고, (2) 미국으로부터 인광석(燐鑛石) 수입 및 해운수송이 편리하며, (3) 인접지에 호남정유, 호남수력 등이 있어 유류 및 전력공급이 용이하고, (4) 남해고속도로 진입이 쉬워 건설부품 및 제품수송이 원활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광양만 지역은 연평균 12-15℃로, 8월에는 최고 32-33℃, 1월에는 최저 영하 8℃ 등 온화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어 비료공장의 입지로는 최적지로 평가되었다. 10월 13일 여천군삼일면낙포리(麗川郡三日面洛浦里)에서 「제7비료」 착공식이 이루어졌다. 제1공구는 「현대건설」이 제2공구는 「大林산업」이 맡아 착공했다. 투입자금은 외자 1억 6백만 달러, 내자 4,550만 달러로 결정되었다. 11월 8일 제7비료 공장 규모가 변경되었다. 공장규모 변경으로 건설비가 23,240천 달러 증가하여 174,740천 달러로 늘어났다. 1977년 8월 4일 「제7비료」 준공식이 이루어졌다.
「7비료공장」의 의의는 박대통령이 “단일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와 최신공정을 자랑하는 제7비공장 건설은 우리가 지난 3년 4개월 동안 고도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룩한 한국 중화학공업의 빛나는 이정표”라고 한 점에서 바로 나타난다.
국무총리기획조정실,《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1973.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제14차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회의보고-대통령 보고문서》대통령비서실, 1973.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Planning Office, Heavy and Chemical Industry Promotion Counci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eavy and Chemical Industry,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