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기술개발촉진법」
1973년 중화학공업화선언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정책
종합연구단지의 선정기준은 ‘(1) 국토의 중심지 (2) 경제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는 배후도시 존재’로 결정되었고 이에 따라 1973년 12월 대덕을 교육 및 연구지구로 결정고시하고 마스터플랜을 확정했다. 마스터플랜에 의하면 총 810만평(나중에 핵연료공단 입주가 결정되어 840만평으로 늘어남)에 34개 기관이 입주(13개 정부출연특정연구소, 국세기술연구소 등 국공립연구소, 충남대학교, 과학원 관리본부전화국, 보건소 등 공공행정기관, 국제회의장, 도서관, 컴퓨터센터 등 연구소 공동이용시설)하도록 되었다. 대덕단지의 심의, 조정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단위계획은 과학기술처, 도로, 용수 등 기반조성은 건설부와 산업기지개발공사가 주관하고, 전력, 통신, 학교 등 지원시설은 한국전력, 체신부, 문교부가, 그리고 주민 이전 및 주택개량 등 주민대책은 내무부(충남도와 대덕군청)가 맡아 추진했다. 1974년 단지조성사업이 추진되었고 1975년 12월 중화학공업 발전의 바탕이 되는 계량계측기술을 국제수준화하는 표준화 연구소 「한국표준연구소」가 대덕에서 설립되었다.
이후 대덕, 창원, 구미 등에서 중화학공업관련연구소가 생겨났는데 특히 대덕연구단지는 기본목표를 (1) 중화학관련연구기관과 전략연구기관을 집중적, 집단적으로 건설하여 두뇌집합단지를 조성하며 (2) 전원도시형 과학단지를 건설하여 연구분위기를 조성하고 (3) 인적, 물적 자원과 시설의 공동활용을 통하여 투자의 효율화를 기하는데 두었다. 1976년에는 선박연구소(대덕), 핵연료연구소(대덕), 화학연구소(대덕), 자원개발연구소(대덕), 전자기술연구소(구미), 기계금속시험연구소(창원), 전기기기시험연구소(창원) 등 중화학공업관련연구소가 집중적으로 설립되었고 이어 1977년에는 열관리연구소(대덕), 통신기술연구소(대덕)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하여 총 투자총액 내자 57,141백만 원, 외자 9,369만 달러가 투입되어 KIST 재료개발센터, 과학기술정보센타분소를 포함하여 1978년까지 총 12개의 중화학공업관련 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한국원자력연구소(1977.4, 과기처),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1962.1 과기처), 한국과학기술연구소, 한국과학원, 자원개발연구소가 서울에 있었는데 이들은 중화학공업 연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보다 광범위한 기초과학 연구를 중심으로 한 연구소였지만 역시 중화학공업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1979년 4월 1일에는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한국정밀기기센터가 흡수통합되었고 1981년 1월에는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한국조선연구소 통합으로 한국기계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 「한국전기기계시험연구소」와 「한국통신기술연구소」 통합으로 「한국전기통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중화학공업관련 전략산업연구기관들의 육성발전을 계기로 하여 연구와 운영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능률적이고 창조적인 국가산업연구개발체제가 정착되었다.
국무총리기획조정실,《제4차경제개발5개년계획 제2차연도 평가보고서: 제1편 종합부문》평가교수단, 1979.
대한민국정부,《행정백서》,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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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 1974년도 시정방침》국회시정연설문, 1973.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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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한국공업화발전에 관한 조사연구(Ⅲ): 정책결정과정의 이면사》, 1979.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중화학공업 추진현황》,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