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1976년 조정
정부는 1976년 12월 30일 경제장관협의회에서 중화학공업조정으로 우선 변압기와 차단기의 일부조정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1) 1979년 말까지 154KV 변압기 제조를 위한 차관과 기술도입을 불허, (2) 전력용 변압기 신규업체 설립 불허, (3) 345KV 변압기, 차단기 등은 「효성중공업」으로 일원화 하는 것이었다. 이후 엔진은 부문별로 나누어 전문화시켰는데 6천 마력 이상 대형엔진은 「현대조선」, 600-6,000 마력 대중형엔진은 「쌍용중기」, 600마력 이하 소형엔진은 「대우중공업」으로 조정하였다. 또 철도차량엔진은 「대우중공업」, 「조선공사」로 이원화하였으며 디젤엔진은 「현대차량」으로 일원화하였다. 자동차는 「현대자동차」, 「새한자동차」, 「기아산업」으로 3원화하였다. 통신 및 전력 케이블은 「대한전선」, 「금성전선」으로, 건설용중장비는 「현대양행」, 「대우중공업」으로, 컬러 TV 브라운관은 「삼성」, 「금성」, 「대한(大韓)」의 3원화로 결정됐다. 과산화수소는 「대한제당」, 「동양화학」으로 각각 이원화하였다. 또한 농기계는 「대동(大同)」, 「유신(惟新)」(국제), 「동양물산(東洋物産)」, 「진일(進一)기업」(효성)으로 4원화하고 폴리에스테 필름은 「선경화학」으로 일원화시켰다.
나. 1977년 조정
1977년 5월 21일, 경제장관협의회는 문제가 들어난 발전설비산업의 조정에 착수하게 되었다. 발전설비 업체는 당시 황금알로 비유되면서 대기업들이 일제히 진입해 관련업체수가 14개에 이르고 내수(內需)대비 생산능력 과잉이 가장 우려되는 부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조정의 내용은 「현대건설」, 「대우중공업」은 해외진출을 위한 엔지니어링 습득에, 「삼성중공업」의 보일러 공장은 산업용 보일러 제작으로 전문화시킴으로써 사실상 일단 발전설비는 「현대양행」으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다. 1978년 조정
1978년 4월 22일 <경제장관 협의회>는 중화학공업 구획조정안을 결정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원자력 발전설비 부문에 「현대중공업」, 「대우중공업」의 참여를 허용한다. 이는 1977년 5월 21일 결정한 「현대양행」 일원화를 해제한 것이며 「삼성」, 「효성」은 과열을 이유로 탈락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삼성」의 반발로 「삼성」은 비행기 엔진제작과 관련 가스터빈 제작사업에 착수하고 「삼성중공업」의 창원공장은 발전용 보일러 제작 허용을 요구하였다. 둘째, 1976년 12월 30일의 중전기 구획정리안을 수정하여 154 KV 변압기 제조시설 투자를 자유화하고 변압기 신규업체의 설립불허를 철회하였으며 「현대중공업」의 중전기 분야 참여를 사실상 허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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