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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중소기업

산업투자/조정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71년 외국인투자 유치정책 발표
1977년 외자도입인가방침 발표
1980년 외국인투자유치확대
1982년 「투자촉진을 통한 경제활성화대책」
1984년 외국인투자제도개편
1985년 설비투자촉진을 위한 금융 및 세제지원 확대
1985년 자본시장육성방안 발표
1994년 외국인투자환경개선종합대책 발표
1972년 산업합리화 자금 조성과 운용 발표
1985-86년 「산업합리화지원기준과 대책」 발표
1987년 산업합리화 향후 대책 발표
1969년 부실기업정리
1986년 부실기업정리
1980년 중화학공업 조정 발표

배경

시장의 기능에 따라 움직이는 선진국가와 달리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후발공업국에서는 초기 공업화과정에서 제한된 자원과 자본이 가장 효율성이 높은 부문으로 집중되도록 하고 또 비효율적 투자에 대해 방향을 조정할 필요성이 존재한다. 또한 자본은 수익성에 따라 투자가 이루어지므로 고수익이 기대되는 곳에는 투자가 집중되고 그 결과 그 부문의 수익률이 다시 떨어지면서 자동으로 투자가 조정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경과

후발공업국이든 선진국이든 투자의 움직임에 의해 경제발전의 속도와 경기순환의 모습이 결정된다. 한국은 특히 자원과 자본이 부족한 국가로서 1960년대 공업화부터 투자재원의 마련과 효율적인 투자유도를 위한 제반 노력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부족한 투자재원을 얻기 위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 월남파병을 결정하였고 수출산업단지를 만들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의 진행정도도 바로 투자의 흐름 변수로 설명될 수 있었다. 또 정부는 부족한 투자재원을 얻기 위해 1970-1990년대 내외자 동원을 위한 모든 정책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였고 가속적인 성장을 위해 투자를 촉진시키는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일부 산업에서 과잉투자가 나타났고 이를 조정하기 위한 필요성과 자동적으로 시장기구에 의해 조정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대두되었다.

내용

한국은 식민지를 통과한 국가로 다른 선진국과 달리 자체적으로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해방된 한국에서 한국은 원조자금과 수출자금으로 자본을 구하려 하였지만 이것이 경제성장에 필요한 만큼의 산업자본으로 전환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1960년대 한국정부는 공업화의 기본자금을 활용하기 위해 대일청구권자금(1965)을 적극 이용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대일청구권자금은 한국공업화의 기초가 되었던 포항종합제철 건설에 사용되었다. 공업화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투자의 필요성은 증대했고 투자재원의 확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정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0년대에는 대표적으로 1971년 「외국인투자 유치정책」이 발표되었고 1977년에는 「외자도입인가방침」이 발표되었다. 1980년대에도 「외국인투자유치확대」(1980), 「외국인투자제도개편」(1984)이 이루어졌고 1990년대에도 「외국인투자환경개선종합대책」(1994)이 공표되었다. 이러한 외자동원은 물론 1970년대 「국민투자기금법」(1974)과 1980년대 「자본시장육성방안」(1985)의 예에서 보듯이 일관되게 내자동원의 극대화 정책과 함께 진행되었다. 또한 시장의 자율적 기능이 불완전했던 1980년대까지 투자촉진을 위한 시책도 계속 이루어져 「투자촉진을 통한 경제활성화대책(6.28조치)」(1982), 「설비투자촉진을 위한 금융 및 세제지원 확대」(1985) 등이 발표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정부의 지원과 상업적 차익을 노린 기업의 도덕적 해이, 잘못된 시책방향, 그리고 투자수익률의 하락 때문에 일부 산업에서 투자의 과부족 문제가 반복되어 이를 조정하기 위한 정책이 합리화, 부실기업정리, 산업조정의 형태로 계속 실시되었다. 1960년대의 외자를 둘러싼 부실기업정리(1969)에 이어 1970년대에는 「산업합리화자금조성과 운용」(1972), 경제장관협의회의 중화학공업조정 논의가 계속되었고(1976-1978) 1970년대 말에는 「현대양행(現代洋行)창원(昌原)공장 및 옥포(玉浦)조선소에 관한 대책」(1979) 등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대통령 사후 일제히 당시까지의 공업정책이 비판되면서 1980년 이후는 산업조정의 시대를 맞았다. 1980년대 중화학공업조정(1980)을 시작으로 「비료공업합리화」(1981), 「해운산업 합리화계획」(1982), 「산업합리화지원기준과 대책」(1985-1986), 「건설중장비와 디젤엔진 산업 합리화」(1986), 「부실기업정리(1986)」, 「산업합리화 향후 대책」(1987), 「발전설비제조업 산업합리화」(1987), 「석탄산업 합리화」(1988), 「조선산업 합리화」(1989)가 계속 발표,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제그룹」, 「한보철강」, 「삼미그룹」, 「명성그룹」 등이 정리되고 사라졌다.

참고자료

경제기획원,《경제안정화 종합시책》신현확(申鉉碻) 부총리 기자회견 발표문, 1979. 4. 17.
경제기획원,《개발연대의 경제정책-경제기획원 20년사》, 1982.
박영구, <1980년 중화학공업 조정에 대한 경제사적 평가>《외대논총》제14집 부산외국어대학교, 1996. 2, pp. 549-571.
박영구, <정부인가 시장인가: 1980년대 중화학공업 조정 이후의 효율성과 시사점>《국제경제연구》 제7권 제1호 한국국제경제학회, 2001. 4, pp. 213-231.
상공부,《중화학공업 투자조정》, 1980. 10. 7
재무부,《재정투융자백서》, 1982.
한국개발연구원,《경제안정화시책 자료집》상, 하, 1981. 4.
한국개발연구원,《산업정책의 기본과제와 지원시책의 개편방안》82-09, 1982.

집필자
박영구(부산외국어대학교 상경대학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