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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병무

중공군 개입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과 두만강선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게 되자, 한반도의 통일은 현실로 다가온 듯 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중국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방향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6 ·25전쟁이 발발한 직후 “이 전쟁에 소련과 중국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으며, 앞으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확인하는 것은 미 정책결정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소련의 전쟁 개입은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을 초래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그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된 반면 중국 개입 가능성과 그들에 대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

당시 중국은 전세가 북한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때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붕괴되고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으로 3 8선을 향해 진격해가자 공공연히 전쟁 개입의사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유엔군측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아울러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중국은 결국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판단과 달리 실제로 중국은 이미 전쟁에 개입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병력 규모도 예상외로 컸다. 그처럼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그 점에 대해 당사국인 중국이 표명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북한의 군사원조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며, 만일 북한이 미국에 의해 점령된다면 적대국가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어 국내 및 국제적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경제 및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원조를 획득하며, 정치적 ·사회적인 면에서 국가의 안정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중국이 한반도의 전쟁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미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 이루어지고 있던 1950년 7월 초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중국은 자체 판단과 소련의 권고에 따라 동북지역의 안전과, 필요시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추기 위해 ‘동북변방’을 조직했다. 


그리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된 후인 10일 1일, 소련과 북한으로부터 공식적인 지원 요청을 접수했다. 이에 따라 모택동은 10월 8일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라 는 명분을 내세워 그동안 출전태세를 갖추어 온 동북변방군을 ‘인민지원군’(人民志願軍)으로 개편(개칭)하고 출병 명령을 하달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스탈린과 김일성에게 통보했다. 


그 후 지원군에 대한 소련의 공군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두 차례 출병이 유보되었으나, 10월 19일, 제4야전군 예하 제13병단의 6개 군 18개 사단(약 18만 명)이, 11월 초순에는 제3야전군 예하 제9병단 3개 군 12개 사단(약 12만 명)이 각각 압록강을 도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참전 하게 되었다. 


한국에 침입한 중공군은 주로 단둥~신의주, 청성진~삭주, 지안~만포진, 임강~중강진 등 동북지역(만주)으로부터 북한 지역에 이르는 4개의 경로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넜다. 그들은 제공권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로 험준한 산악지대를 따라 집결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매일 오후 7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야간에 행군하고 도착 지점에서는 참호를 파고 휴식을 취했다. 그 같은 은밀한 야간 행동 때문에 유엔 공군은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참고자료

국방부 <<한국전쟁사>>제5권 국방부, 1972.
양영조 외 <<6.25전쟁사>>제3권 신오성, 2005.
박두복 외 <<한국전쟁과 중국>> 백산서당, 200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중국군의 한국전쟁사>>제1권 신오성, 2004.

집필자
양영조(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종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