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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해양수산

민유림조림10개년계획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근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수립한「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나라의 국토는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남·북한은 서로 다른 체제에서 각각의 산림정책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식량난과 인플레이션 등에 의해 사회경제적 상황은 악화되었고, 남한의 산림자원은 그 이전의 40% 수준으로 감소하였으며, 에너지원의 부족에 의해 목재수요량은 급증하였다. 


1946년 당시 남한의 산림면적은 6,814천정보, 산림축적은 5천4백만㎥, 정보당 산림축적은 약 8㎥로 측정되어, 일제하 자원약탈적 식민지임업의 실행으로 인하여 산림자원은 극도로 황폐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나무 한그루를 베면 다섯 그루를 심어야한다는 5식1벌주의(5植1伐主義)가 제기되는 등 조림사업은 급선무가 되었으며, 곧이어 1949년에서 1958년까지 10년간의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이 수립되었다.

경과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의 당초 목표는 총 350만정보의 조림계획으로서, 여기에는 132만정보의 면적에 약 35억본의 인공식재와 함께, 606천립의 종자를 심는다는 파종조림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0년간의 장기계획이었으므로, 제1차 계획(1949~1953) 및 제2차 계획(1954~1958)으로 구분하여 추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6.25전쟁(1950~1953) 등 사회경제적 혼란과 함께 다수의 계획이 복합적으로 수립되어 추진되면서, 이 사업은 당초의 계획대로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제1차 계획 기간 중인 1952년에는 6.25전쟁의 상황이 다소 호전됨에 따라 보다 계획성 있는 산림사업을 실시하기 위하여 1951년말 현재로 산림현황을 조사하였다. 이와 동시에 부족한 농촌연료의 공급 등을 목적으로 싸리나무, 오리나무, 아까시나무 등을 식재하기 위한「단기속성수녹화조림 3개년계획」(1952~1954)이 추진되었고, 일반 농가의 나뭇가지 울타리 설치로 인한 생나무 벌채를 줄이기 위하여「생울타리조성 5개년계획」 등이 수립 추진되었으나, 정부의 재정자금 부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54년 2월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이후에는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및 국제협력처(ICA)의 원조자금에 의해 조림사업이 비교적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조림의 방향도 종래의 개별 분산조림을 지양하고 1정보 이상의 산림계 위탁조림 및 정조식 식재를 추진하였고, 장차 용재공급을 위한 용재림 조성, 농산촌 임산연료의 공급을 위한 농용림 조성 등으로 구분하여 실시되었다. 또한 1957년부터는 농가의 부수입 증대를 위한 「특수림조성 5개년계획」(1957~1961) 이 수립되어, 밤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 등의 유실수와 옻나무, 닥나무, 오동나무 등 공예수를 부락 산림계로 하여금 식재하도록 하였다(산림청, 1997).

내용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에 의한 인공식재의 계획 대비 실적을 보면 다음과 같다(표 1). 인공식재의 총 면적은 778천정보, 총 식재본수는 2,252,898천본으로서, 각각 계획 대비 59%와 64%에 머물렀다. 1차 계획 기간의 경우, 6.25전쟁으로 인하여 조림면적은 319천정보로서 계획 대비 45%에 머물렀으며, 2차 계획 기간의 조림면적은 459천정보로서 계획 대비 74%를 달성하여 1차 계획 기간보다 다소 증가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림실적의 경우, 당시 통계자료의 출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의 조림사업의 투자재원을 보면, 국제원조자금이 3,422백만환(82%), 정부예산이 736.5백만환(18%)으로 대부분 원조자금에 의존하였다.


<표 1>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의 실적 (단위 : 정보, 천본)

연 도

계 획

실 적

면 적

식재본수

면 적

식재본수

1차

계획

1949

134,895

305,138

54,745

167,952

1950

139,826

316,685

92,957

232,413

1951

143,241

323,517

85,394

236,480

1952

144,376

324,028

43,219

112,015

1953

143,405

324,936

42,536

147,577

소계

(%)

705,743

(100)

1,594,304

(100)

318,851

(45)

896,437

(56)

2차

계획

1954

142,904

328,402

53,134

166,400

1955

143,241

323,527

82,551

261,299

1956

110,000

425,000

92,017

268,009

1957

110,000

425,000

96,829

287,815

1958

111,000

425,000

134,413

372,938

소계

(%)

617,145

(100)

1,926,929

(100)

458,944

(74)

1,356,461

(70)

합 계

(%)

1,322,888

(100)

3,521,233

(100)

777,795

(59)

2,252,898

(64)

자료: 한국임정연구회《치산녹화30년사》, 1975


이와 같이 민유림조림 10개년계획의 성과는 비록 당초 계획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특히 6.25전쟁으로 인한 국가 재정사정의 곤란과 산림사업에 대한 투자도 국제원조자금에 의해 이루어지는 등 여러 가지 난제를 감안하여 볼 때, 당시 정부의 산림녹화에 대한 의지를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산림청,《한국임정50년사》, 1997


한국임정연구회,《치산녹화30년사》, 1975

집필자
최인화(강원대 산림경영학과 교수)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7.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