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과학기술

이태규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이태규(李泰圭, Ree Taikyue) 1902. 1. 26∼ 1992. 10. 26

이태규는 일본의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이공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으며(1931년),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구능력을 인정받아 교토제국대학의 조교수(1935년), 교수(1943년)가 되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초대 문리대학장이 되어 학문 연구와 교육의 정착에 노력했으며, 1948년 미국 유타대학 화학과의 교수로 자리를 옮겨 탁월한 이론화학자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1970년 유타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많은 수의 학국인 학생들을 지도했으며, 이후 귀국하여 1973년부터 한국과학원의 석학교수가 되어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연구활동을 계속하여 한국 화학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이태규는 1992년 별세후 국립묘지에 안장된 1호 과학자가 되었으며, 2003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이 설치될 때 첫 번째 헌정자 14명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내용

가. 기본정보
이태규는 1902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교토제국대학 이학부에 진학하여 지도교수 호리바 신기치(堀場信吉)의 지도하에 화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였다. 1927년 대학을 졸업하고 촉매작용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1931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는 일본에서 이공학 분야에서 한국인이 취득한 첫 번째 박사학위였다. 그는 학위를 받은 이후 호리바 교수의 조수, 이학부 조교수로 교토제국대학에 머물려 촉매작용에 관한 실험과 이론적 연구에 몰두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연구원으로 연구경험을 쌓았으며, 양자화학의 세계적 권위자 아이링 교수와 공동연구를 수행했다.


호리바 교수의 은퇴 이후 뒤를 이어 정교수의 자리에 오른 이태규는 해방이 되어 귀국하여 국립서울대학교 화학과의 교수이자 문리과대학의 초대학장에 임명되어 화학과와 문리과대학의 기틀을 닦았다. 3년여의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아이링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재직하던 미국 유타대학 화학과로 옮긴 이태규는 반응속도록, 유변학, 액체이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우수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태규가 재직했던 유타대학에는 많은 수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화학 분야 뿐 아니라 물리학 등 여러 과학분야에서 한국인들이 이태규의 지도를 받았다. 이태규는 한국이 낳은 우수한 이론화학자로서 ‘비뉴튼 유동에 대한 이론’ 등 우수한 업적을 남겼으며,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하여 한국 과학계에 크게 이바지했다.


나. 주요 공적 1: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
이태규는 화학에 발을 들여놓은 후 평생에 걸쳐 오직 연구에만 정진한 학자였다. 그는 일생 중 50여 년을 일본(1920∼1945)과 미국(1948∼1973)에서 연구자로 활동하며, 촉매작용, 반응속도록, 유변학, 액체이론 등의 분야에서 우수한 연구업적을 발표했다. 특히 1950년대 유타대학에서 양자화학의 권위자 아이링 교수와 공동으로 수행한 유변학 연구는 그의 대표적 연구성과이자 핵심적인 연구주제가 되었다.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알려진 비뉴튼 유동에 대한 이론은 1955년 “비뉴튼 유동이론”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의《응용물리학잡지》에 발표되었는데, 그간 이론적인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튼 유동현상을 다울 수 있는 일반공식을 제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미국 화학회의 산업 및 공업화학 분과로부터 상패를 받기도 했으며, 1965년 화학분야 노벨상 추천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탁월한 이론화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다. 주요 공적 2: 한국 현대 화학계의 기초 구축
이태규는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장과 이듬해 국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장으로서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학문연구와 교육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이태규는 1946년 대한화학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서울대학교 화학과의 교수진을 전원 제국대학 졸업 이상의 고급 인력으로 초빙하여 다른 학과에 비해 충실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을 닦았다. 유타대학에 재직하면서도 한국화학계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그가 재직하는 동안 양강, 한상준, 장세헌, 김각중, 전무식, 백운기 박사 등 한국화학계를 이끌어나간 탁월한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물리학의 권숙일, 이용태 박사 등도 유타대학에서 이태규의 영향과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이태규는 유타대학에서 아침 9시에 연구실에 출근하여 새벽 1시까지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주위의 한국 학생들도 자연히 그의 생활습관을 따르게 되었다. 1973년 귀국한 이후에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연구실에 출근하여 연구활동을 계속했으며, 여러 학생들의 학위논문 연구를 직접 지도하면서 매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참고자료

한국과학문화재단〈헌정대상자에 관한 인물 및 자료 조사연구〉《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2003
김근배 외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인》해나무, 2005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 ( http://www.kast.or.kr/hall/)

집필자
문만용(서울대학교 강사, 과학사)
최초 주제 집필
2007.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4.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