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교육지 사건 이후 정부는 교사들의 교육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YMCA 중등교육자협회를 중심으로 한 교사들의 활동범위도 넓혀가고 있었다. 학교 현장 단위마다 소모임이 조직되어, 상호 연대하여 민주화를 위한 교육실천을 시도하거나 YMCA 중등교육자협회 주최의 각종 공개집회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역량을 키워가고 있었다. 학급 문집을 발간하는 등의 민주화 교육을 실천하려는 교사들에 대하여 의식화 교육을 했다고 전보 조치, 각서 제출 등의 인사 상 불이익을 주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자 YMCA 중등교육자협회는 그간의 조직 및 역량 강화를 기반으로 하여 1986년 5월 10일 서울, 부산, 광주, 춘천 지회에서 「제1회 교사의 날」집회를 갖고 교육 민주화선언을 발표하였다. 전국 800여 명의 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려 500여 명의 교사들이 교육 민주화선언 서명에 참여하였다. 교사들이 주체적으로 교육민주화의 의지를 표명한 교육민주화선언은 교원운동 대중화의 기틀이 되었다. 또 최초로 교육의 주체를 학생, 학부모, 교사라고 밝힌 교육 주체 선언으로 이후 교육 민주화운동의 방향타 역할을 하였다.
교육민주화선언은 당시 학교교육의 모순을 지적하고 교육민주화를 주장하였다. 선언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교육민주화를 위해서는 1)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교육은 정치에 엄정한 중립을 지켜 파당적 이해에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교사의 교육권과 제반 시민적 권리는 침해되어서는 안되며,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권도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3)교육행정의 비민주성, 관료성이 배제되고 교육의 자율성이 확립되기 위해 교육자치제는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4) 자주적인 교원단체의 설립과 활동의 자유는 전면 보장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탄압은 배제되어야 한다. 5)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저해하는 온갖 비교육적 잡무는 제거되어야 하며, 교육의 파행성을 심화시키는 강요된 보충수업과 비인간화를 조장하는 심야학습은 즉각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육 민주화선언이 있은 직후 정부는 여기에 참여한 교사들에 대하여 중징계 방침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일선교사들, 학생, 종교단체, 재야단체들은 교육민주화선언을 적극 지지함과 동시에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연좌농성을 하고 징계 철회와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연달아 발표하였다. 또한 관련 교사들도 징계절차에 불응하였다. 징계부당론이 확산되자 교육당국은 1986년 5월 17일 관련 교사들에 대한 감봉, 경고 등으로 일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육민주화 선언은 5월 29일 강릉지역 교사들의 교육 민주화선언, 6월 14일 충청지역 교사들의 교육 민주화선언, 7월 12일 전북지역 교사들의 교육 민주화선언으로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또한 서울, 호남, 해남, 강원, 영남, 전주 지역의 교원들은 교육 민주화 실천 결의대회를 개최하여 교육 민주화선언의 의미와 정신을 전파하는 조직적인 단체행동을 전개하였다.
교육 민주화선언은 점차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형태로 전개되던 교사운동이 대중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교육 민주화선언은 1987년 8월 13일 전국적인 교사운동 대중 조직체인 민주교육 추진 전국교사협의회를 결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으로 연결되는 기반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원들에게 교육 민주화운동 경험을 제공하면서 교원들의 정치 참여의식을 높이고, 해직 등의 정부 탄압에 대항하여 운동세력 내의 결속력을 강화하여 교육운동 주체의 인적 역량을 교육하는 기회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한국교육운동백서』, 풀빛, 1997
시민의 신문, 『한국시민사회운동 15년사』, 시민의신문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