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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김선일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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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를 소탕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였고, 이어 대량살상무기의 제조 및 보유를 문제삼아 2003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동맹국들에게 군대를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해 옴에 따라 한국은 2003년 4월에 서희부대와 제마부대로 명명된 총 675명의 건설공병단과 의료지원단을 이라크로 파병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2003년 9월 9일 한국의 전투부대를 이라크에 추가로 파병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국 국내에서는 파병 문제를 놓고 국민적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평화정착 및 신속한 전후 재건 지원’을 명목으로 이라크 추가파병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후 파병 규모와 부대의 성격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았으나, 한국은 서희·제마부대와는 별도로 병력 약 3,000명 수준의 ‘자이툰’ 부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이라크 내부의 저항세력들이 미국에 대해 게릴라전을 시작하였고, 종파간 내전의 양상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라크 저항 세력들의 테러와 민간인 납치도 빈발하여, 2004년 4월에는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한국 선교사 7명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일본, 영국, 이스라엘인들도 피해를 입었다. 4월 14일에는 이탈리아 인질 한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한 외국인 납치·피살 사건이 잇따랐다.

내용

2004년 6월 21일 미군납업체인 가나무역의 직원으로 이라크에서 활동 중이었던 김선일씨가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납치된 소식이 알려지자 정부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김선일씨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였고, 국민들도 김선일씨의 무사석방을 기원하였다. 특히 저항세력이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문제 때문에 김선일씨를 납치한 것으로 알려지자, 국내에서는 이라크 파병반대 주장이 더욱 거세어졌다.


김선일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군납업체인 가나무역에 입사하였고, 2003년 6월 15에 이라크로 입국하였다. 김선일씨는 직장생활과 선교활동을 겸해 이라크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2004년 5월 31일 물건배달을 위해 바그다드에서 200km 떨어진 미군 리브지 캠프를 출발해 팔루자 인근 지역을 지나가다가 ‘알 타우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라는 저항세력에 의해 납치되었다. 김선일씨로부터 며칠 동안 연락이 없자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은 단순 사고로 판단하여 개인적으로 김선일씨를 찾고 있었고, 결국 김선일씨는 저항세력에 의해 납치된 것을 알게 되었다. 김천호 사장은 현지 변호사를 고용해 석방 교섭을 벌였지만, 이는 6월 21일 알 자지라 방송이 한국군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한 저항세력이 한국인을 피랍하고 있다는 방송을 하게 될 때까지 소득 없이 시간만 보내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김선일씨가 실제로 납치된지 20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김선일씨의 납치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정부는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김선일씨의 신변 확보에 집중하였고, 최영진 외교차관을 반장으로 한 긴급 대책반이 가동되었으며, 국외테러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한편, 저항세력의 요구사항인 한국군 파병 철회에 대해서 NSC는 파병철회는 불가능함을 대내외에 공표하였다. 장재룡 외교부 본부대사 등이 긴급 협상대표단으로 현지에 파견되었고, 반기문 외교장관도 알 자지라 방송에 직접 출연하여 김선일씨의 석방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기원에도 불구하고, 김선일씨는 납치된지 22일 만인 6월 23일, 팔루자 인근 도로변에서 참수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김씨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저항세력의 테러행위를 강력히 규탄하였으며,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 전후 복구와 이라크 재건을 위한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하지만 김선일씨의 피살을 막지 못한 정부의 정보력 부재와 무능함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또 교민보호를 업무를 소홀히 한 것 때문에 외교부도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은 한국의 9.11테러라고 불릴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지만, 한국은 3,600명으로 구성된 자이툰 부대를 이라크 아르빌에 파견하였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연중무휴 24시간 운영되는 영사콜센터가 11월 15일에 문을 열기도 하였다.

참고자료

《조선일보》
《동아연감》, 2005
《연합연감》, 2005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