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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북한의 식량위기와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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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북한은 1995년 여름 이후 수차례의 홍수와 가뭄을 겪으면서 심각한 식량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북한 스스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로 표현한 이 위기의 시대는 북한 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에 자연재해가 겹쳐 수많은 북한주민들의 기아사를 가져왔고 많은 주민들의 중국지역으로 탈북을 결과했다. 당시 북한은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자연재해를 국제사회에 보고하며 국제사회의 인도주의적 지원을 호소하였다.

내용

1995년 7월 26일 이후 북한은 엄청난 홍수를 겪는다. 당시 북한 기상청은 10일동안 약 600mm의 비가 내렸다고 보고하기도 했는데, 어떤 지역에서는 하루동안 450mm가 내린 것으로 유엔은 파악하고 있었다. 1995년 초가을 북한은 홍수로 인해 농업생산이 황폐화되었으며 따라서 식량부족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국제사회에 보고했다. 문제는 이 홍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홍수가 찾아오고, 그 다음해에는 심각한 가뭄이 들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으로 인해 이미 오랫동안 식량부족을 겪어 왔기 때문에 연속적인 자연재해는 식량사정을 악화시켜 심각한 식량위기가 발생했다. 이러한 식량위기는 북한 역사상 최악의 인도주의적인 사태를 야기하며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수령옹호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했는데, 김정일 위원장 본인 스스로 김일성대학 50주년 기념 연설에서 식량위기로 인해 북한 정권의 안보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북한의 사회안전부는 1997년 5월 식량절도에 대해 총살형에 처한다고 선포하였는데, 이는 식량위기로 인한 북한 내부의 혼란상태가 상당히 위협적인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식량위기로 인해 많은 북한 주민들이 아사했는데,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는 1995년에서 1998년사이에 22만명 정도가 아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국제사회는 대체로 200∼300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북한 인구의 10%를 상회하는 엄청난 숫자인데, 한국의 정보기관 역시 1999년 2월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총인구가 250만에서 300만정도가 감소하였다고 추산하였다. 1997년 2월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역시 북한의 통계기관의 내부 보고내용을 언급하면서 1995∼96년도에 대략 150만명이 사망하였고, 1997∼98년도에 대략 200만이 사망한 것으로 증언했다.


과거 북한이 사회주의 낙원임을 강조하면 내부적인 어려움을 숨겼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자연재해와 식량난을 적극적으로 국제사회에 공개했으며 때로는 과장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1995년 8월 말 북한은 사상 이례적으로 북한의 자연재해를 신속하게 보고하며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유엔에 5억불의 홍수구호자금과 연료, 의료품 지원을 요청했는데, 재난지역을 조사하려는 국제사회의 요구도 이례적으로 허용하기도 했다.


냉전의 종식이후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던 식량지원이 급감함으로써 북한은 이미 상당한 식량난을 경험하고 있어서 고난의 행군 이전인 1994∼95년도에도 이미 각각 약 2백만 톤의 쌀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자연재해와 더불어 북한 내부의 비료생산이 점점 더 감소해서 농업생산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300그램이던 배급량이 1996년도에는 절반이하로 감소되었고, 완전히 중단된 곳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북한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나무뿌리와 잎사귀, 풀 등을 닥치는 대로 연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식량지원 요청에 대해 한국의 김영삼 정부와 일본은 이미 1995년 1월 각각 15만톤과 50만톤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은 쉽지 않은 국내정치적 문제를 야기하였다. 1995년 6월 27일에 북한으로 들어가는 식량지원 선박에 북한의 관리가 인공기를 게양하게 하는 사건은 한국 내부의 여론을 심각하게 악화시켰으며, 김영삼 정부 역시 북한에 대한 쌀 지원문제를 국내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특히 북한의 경직된 태도는 한국내에서 식량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드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대북 식량지원은 계속되었으며 1997년도에는 적십자사를 통해 5만톤의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역시 유엔의 긴급지원요청에 2백만불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북한에 지원되는 식량과 자금에 대해 군사적 전용을 우려한 논쟁이 있기도 했으나, 당시는 1994년 핵 합의 이후로 북미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서 호전되고 있던 시점이었으므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던 시기였다.

참고자료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두개의 한국》 길산, 2003
황장엽, 《나는 역사의 진실을 보았다》 한울, 1999
앤드류 나초스(Andrew S. Natsios), 《북한의 기아: 기아와 정치, 그리고 외교정책》 다할미디어, 2003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