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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카터방북과 카터-김일성 회담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북한의 핵 활동에 대한 의혹으로 시작된 한반도 핵 위기는 1994년 6월 중순까지 극단적인 위기상태로 치닫고 있었으나, 평양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합의에 의해 위기가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카터-김일성 회담〉은 이후 7월의 북미 고위급회담으로 이어졌으며, 10월 2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된〈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의 기초가 되었다.

내용

1994년 6월 중순까지 북한 핵 의혹을 둘러싸고 북한과 국제사회는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북한의 과거 핵 재처리 활동에 대해 국제사회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통해 북한이 의혹을 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북한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는데, 1994년에 들어 양측의 이러한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 졌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압력에 대응하여 5월 중순부터 영변의 원자로에서 핵 연로봉을 제거하여 재처리하기 시작하였으며, 6월에 들어서는 IAEA 사찰단을 추방하고「안전담보협정(Safeguards Agreement)」의 이행을 거부할 것임을 통고했다. 이에 미국은 6월 중순 유엔의 대북제재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제재 초안을 회람시키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유엔의 대북제재와 더불어 북한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한반도 주변에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하였는데, 실제로 북한의 영변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계획을 세우며 군사적 방법에 의한 북한 핵 문제 해결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6월의 북한 핵 위기는 〈카터-김일성 회담〉으로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카터는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고「핵확산방지조약(NPT)」에 복귀하여 IAEA가 북한의 핵동결을 감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카터의 제의를 수락하며, 북한의 흑연감속로를 새로운 경수로로 교체하는 것을 미국이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미국이 북한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하기를 요구하였다.


〈카터-김일성 회담〉이후 미국의 북핵담당 대사인 갈루치는 6월 20일 강석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터-김일성 합의를 북한이 확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핵동결의 포괄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새로운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틀 뒤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인 강석주가 카터-김일성 합의와 미국의 새로운 조건을 수용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이에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에서 북미 고위급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하였으며, 고위급회담의 결과 그해 10월 21일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졌다.


카터는 또한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의〈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는데, 김일성이 이를 수용함으로써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7월 말 평양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당시의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으며, 이는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참고자료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두개의 한국》 길산, 2003
조엘 위트(Joel S. Wit) 외, 《북핵위기의 전말: 벼랑 끝의 북미협상》 모음북스, 2005
Leon V. Sigal, 《Disarming Strangers: Nuclear Diplomacy with North Korea》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8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