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전체메뉴 닫기

분야별 검색

  • Home
  • 기록물 열람
  • 통합검색
  • 분야별 검색

외교

일본 후지오 문부상 망언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원인

1986년 7월 25일의 기자회견에서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편집한 고교 일본사 교과서 '신편 일본사'가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후지오 마사유키(藤尾正行) 문부장관은 “그것은 전 내각에서 끝난 것이므로 더 이상의 일은 없다. 그것으로 족하다. 불평을 늘어놓는 자는 세계사에서 그 같은 일을 한 적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라. 이쪽이 인정하는 것은 좋지만 상대도 인정해야지.”라고 대답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일본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대해 주한 일본공사는 나카소네 수상도 "본건 발언이 외국에 오해와 불쾌감을 주었다면 매우 유감이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했고, 31일에는 공식적으로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8월 22일에 열린 참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문제의 발언에 대해 후지오는, "문부대신으로서 말투가 부적당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은 나의 부덕이다. 사과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가 개인으로서 나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답변했다. 한국정부는 이 발언은 한일관계를 파탄시킬만한 “망언”으로 규정하고 후지오의 즉각 파면과 해명을 요구하게 되었다.

내용

후지오 장관은 그 후 일본의 유명 월간잡지인 《문예춘추》1986년 10월호에 자신의 발언을 정당화하는 글을 게재하여 사건은 더욱 확대되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당시 조선반도는 도대체 어떠한 정세에 있었는가. 다름 아닌 청국의 속령입니다. 그 청국의 조선에 대한 영향(influence)이라는 것은 왠 일인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국이 일본에 패해, 그 대신 일본이 진출하려고 했는데 삼국간섭이 있었지요. 일본은 굴복을 강요당했고, 그 뒤에 어슬렁어슬렁 나온 것이 러시아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었으면 조선반도는 러시아의 속령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미운 놈의) 배때기가 나타난 것이니까, 어떻게 하든 이것을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뿌리를 자르려고 하는데 러일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지금 한국에 대한 침략이라고 한창 거론되고 있는 한일의 합방에서도, 적어도 그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을 겁니다. 한일의 합방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을 대표하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을 대표하고 있던 고종간의 담판과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도 사실상으로도 양국의 합의 위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고종이 진정한 대표였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고, 합의를 인정토록 하기 위한 일본 측의 압력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토 히로부미의 교섭 상대가 조선의 대표자 고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므로 한국 측에도 얼마간 책임이나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만일 합방이 없었더라면 청국이나 러시아가 혹은 나중의 소비에트가 조선반도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보증이 있는지 어떤지. 그러한 것까지 모두 생각한 다음에 일본이 조선반도로 나갔던 것은 침략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일본이 나쁘다는 식의 논의라면 그런대로 짐작은 갑니다만” 9월 6일자 각 언론은 후지오 문부장관이 동월 10일에 발매되는 《문예춘추》10월호에 이상과 같이 발언했다고 소개했다. 일본의 국민들 조차도 후지오 망언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9월 6일 재일 한국공사는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이래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라면서 사실상 항의 의사를 표명하고, 8일에는 한국 외무장관이 "매우 유감"이라고 정식으로 항의했다. 한편 일본의 각 신문도 7일자 사설에서, '후지오 발언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다'《아사히신문》 '각료로서의 자질이 문제시되는 후지오 발언'《요미우리신문》, '외교센스가 없는 정치는 나라를 망친다.《니혼게이자이신문》라고 비판했다. 자민당 내에서는 후지오의 자진 사퇴를 기대하는 눈치가 많았지만, 후지오는 그것을 거부하다가 결국 8일에 파면되었다. 


각료의 파면은 33년만의 일이었다. 문부상에서 파면당한 후 후지오는《문예춘추》지에 재차 기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물론 당시 일본정부가 취한 행동이 세계열강과 마찬가지로 공리적인 것이 아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본만이 비난당하는 것은, 이 또한 공정을 결한 것이 아닐까. 거듭 말하면, 19세기의 조선 대한제국에는 독립 국가를 유지해갈 만한 능력도 기개도 없어, 외교적인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는 측면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낳은 책임의 절반은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은 현명한 한국인들도 가슴깊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합된 한국에 대해 일본이 매우 악의를 갖고 있었을 리도 없는 것 아닙니까. 가령 기초적인 교육에 대해서도 일본은 많은 예산을 투여했던 만큼, 세계 식민지 가운데 식자율이 가장 높다는 측면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를 들면 관동대지진 때 여러 가지 소문을 흘려 그들에게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나쁜 짓만을 한 것은 아닙니다.(중략) 그런데 내가 제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과거의 죄를 전부 메이지의 선각자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만든 메이지의 대훈(大勳)들이 한 일이 모두 피로 얼룩진 침략이자 악역무도한 제국주의였다고 하면서, 나카소네를 비롯하여 쇼와의 정치가들이 입을 닦고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용서될까 하는 것입니다.” 《문예춘추》 지는 '후지오 발언의 파문'이라는 특집에서 후지오의 지론을 옹호했다. 10월 10일 발매된 이 잡지의 내용은 10월 5일 각 신문에 소개되었다. 


그러자 아이치대학의 우부가타 교수 등의 호소로 10월 23일에 시민집회 '후지오 발언 문제를 생각한다 -「한·일병합조약」을 다시 묻는다'가 열렸다. 또 "책임의 일부는 역시 시대착오로 무능력한 조선 대한제국 측에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망언에 대해, 일본의 지식인 102명은 그 날 낸 "국민과 국회에 호소하는 '후지오 발언 문제에 대해서'"라는 성명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한국 조선인이 식민지화된 자신들의 허약함을 반성하는 것과,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한 일본의 행위가 비판되고 추궁당하는 것은 별개 문제이다.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침략자와 침략당한 자, 범한 자와 당한 자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는 것과 같아, 죽인 자, 범한 자를 면죄하려는 의논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후지오는 일본 각지에서 강연을 하며, "(일본은) 한국에도 산업을 일으키는 등 선의로 통치했다."라는 등의 말을 반복했다.

참고자료

〈방언대신(放言大臣) 크게 외친다〉《文藝春秋》 1986年 10月號
〈방언대신' 다시 외친다 〉《文藝春秋》 1986年 11月號
하영선 편,《한국과 일본: 새로운 만남을 위한 역사인식》나남출판, 1997
이숙종 편,《전환기의 한·일관계》세종연구소 , 2002
김영작·이원덕 편, 《한국에게 일본은 무엇인가?》한울, 2006
최상용·이면우·이원덕,《탈냉전기 한·일관계의 쟁점》집문당, 1999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