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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8·15선언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1960년대 후반 경제발전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 정부는 〈8·15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이는 또한 미·소 데탕트와 미·중화해의 국제정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이후 실천적인 통일정책을 제시하고, 남북대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평화통일구상선언은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하여 발표한 것이었다. 청와대가 중심이 되어 학계와 언론계의 자문과정을 거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9년을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 면에서 북한을 앞질렀다는 판단 아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과 선의의 체제경쟁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내용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과 북한이 선의의 체제 경쟁을 하고, 북한의 유엔 참여에 반대하지 않으며, 남북한 간 접촉 용의가 있다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 구상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8·15선언〉이 북한의 위협과 반공에 대한 기본적 시각의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다. 〈8·15선언〉은 우선 “무릇 공산주의의 정치체제는 기본 인권의 유린과 철의 기율에 의지한 전체주의적 일당독재”이며, 김일성 체제는 “전형적인 극좌 모험주의와 역사 날조를 일삼는 개인 신격화가 판치는 폐쇄 사회”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이 먼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 기도를 포기한다면, “인도적 견지와 통일 기반 조성에 기여할 수 있으며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유엔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괴가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대통령은 남과 북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는지 선의의 체제 경쟁에 나서자고 촉구했다.
역사적의의
북한의 대남 무력공세로 악화일로로 치닫던 남북관계는 미중화해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미국과 중국은 상호 화해를 추구하면서 한반도에서 역풍을 방지하기 위해 각각 한국과 북한에 남북대화를 권고하게 된다. 〈8·15선언〉은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박정희 정권이 적응하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새로운 대북정책을 펼치는 신호탄이 되었다. 〈8·15선언〉 이후 한국은 계속해서 적극적인 대북 제의를 통해 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 등 남북대화를 진행시켰다.
참고자료
우승지,〈남북화해와 한미동맹관계의 이해, 1969∼1973〉《한국정치외교사논총》26집 1호, 2004.8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