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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6·3사태와 한미관계

주제유형
하위주제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발생배경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미국은 경상적자 누적의 가속화라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담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자신의 공약이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을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경제적 역할확대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적극적으로 중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 보다 구체화되었다. 한편 경제개발을 통하여 통치 정당성의 결함을 보충하고자 하였던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도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원으로서의 일본의 중요성이 컸다. 특히 미국의 대한 원조의 지속적인 감소와 내부자본 동원의 한계라는 장애에 직면한 한국에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원의 유입은 절실하였다.


이렇게 미국과 한국의 입장이 조응되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는 탄력을 받게 되었다. 특히 1962년 11월 12일에 있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상 오히라의 막후협상이 이루어지면서 한일 국교 정상화는 진전을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협상을 통하여서 그동안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이었던 대일청구권 문제에 대한 비밀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민정 이양이 완료된 이후 박정희 정부는 악화되어 있는 경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마침내 〈1964년 3월 회담〉에서 한국측 대표인 김종필 민주공화당의장은 오히라 일본 외무상과 함께 5월에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최종 타결될 것이라고 공식발표하였다.


하지만 〈한일회담〉의 타결이 임박해졌다는 소식은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야당과 지식인 및 학생들의 비판을 야기하였다. 이들의 비판은 한일국교정상화 자체가 아니었다. 이들이 한일 회담을 반대한 이유는 박정희 정부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한일회담을 지나치게 빨리 종결하려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대일 청구권을 지나치게 낮은 액수에서 합의하였다는 의구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내용

굴욕적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는 박정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학생시위상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시위사태로 말미암아 심각한 정치적 위기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는 서울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한미관계의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대규모 시위사태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달성하고자 하는 자신의 중재 외교에 중대한 난관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정부는 한국의 대규모 학생시위사태로 한일 회담이 난관에 부딪힌 데 대하여 크게 실망하였다. 한편 미국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의 중요한 원인으로서 김종필과 그의 세력을 지목하고 그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김종필이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하여 한일회담에서 매국노와 같은 행위를 하였다는 반 김종필 세력의 상황인식에 동조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은 박정희에게 김종필을 권력 핵심으로부터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역사적의의

참고자료

마상윤,〈제 3공화국 정치와 외교의 전개〉김용직(편)《사료로 본 한국의 정치와 외교: 1945∼1979》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5
전재성,〈1965년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미국의 대한(對韓)외교정책〉《한국정치외교사논총》26집 1호, 2004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12. 09.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