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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한국군 근대화 계획

주제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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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필 내용은 국가기록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제설명
배경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곧 한국과 미국 사이의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재침략 가능성을 우려하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에게 한국의 국방력 강화를 요청하였다.

내용

1953년 7월 Robertson 미국 특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미 양측은 한국 육군의 병력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키며, 그에 비례하여 해군 및 공군 전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미국이 주한미군 2개 사단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자 한국 정부는 더 많은 한국군 병력 증강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정부는 미군 2개 사단이 철수하더라도 20개 사단의 남한 병력과 미군의 공군력은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공격을 하더라도 이를 막아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히려 미군을 철수시킴으로써 남한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미국은 결코 이를 돕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승만에게 분명히 인식시키려고 하였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는 남한의 방위 수준을 약화시킴은 물론, 북한의 재침략 의도를 자극할 것이므로 남한의 병력을 35 내지 4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승만대통령은 이 정도의 병력이면 미국의 도움 없이도 북침을 단행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의 병력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더욱 많이 받기 위해 때마침 불거져 나온 〈제네바 정치회담〉 참석 여부 문제를 이용해 자신의 협상력을 강화시키려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3월 Eisenhower 대통령에게 남한과 함께 전쟁을 재개하든지, 아니면 남한이 〈제네바 회담〉에 참여하는 대가로 현재 한미간에 합의되어있는 20개 사단으로의 병력 증강 계획에 덧붙여 15개 내지 20개의 사단을 증설하고,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Van Fleet 전 미8군 사령관을 한국에 파견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전쟁 요구는 물론 병력 확대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미국 정부로서는 남한이 40여 사단 병력을 보유할 경우 북침을 개시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같은 요구를 반복하자,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즉, 철수하는 미군의 장비를 한국 육군에 제공하고, 해군과 공군을 확대, 재편하고 현대화시키며, 예비군을 창설하며, 현역 및 예비군 병력의 가능한 규모를 조사하기 위하여 Van Fleet 장군을 한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한국군 군사력 증강 문제는 1954년 7월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으며, 미국 정부는 한국에게 10개 예비사단을 추가로 신설하고, 그 중 4개 사단은 철수할 미군 4개 사단의 장비로 무장시키며, 두 척의 호위 구축함과 200대의 전투기의 추가 제공과 그리고 6개의 전투비행대대를 추가로 신설한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한국군 근대화 계획은 이후 한미 실무진의 협상을 거쳐 ‘한미합의의사록’에서 합의되었다. 이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에게 10개 예비사단의 추가 신설과 79척의 군함, 그리고 약 100대의 제트전투기 제공을 약속하였다.

참고자료

Yong-Pyo Hong ,《State Security and Regime Security: President Syngman Rhee andthe Insecurity Dilemma in South Korea, 1953-60》 Macmillan, 2000
차상철,《한미동맹 50년》 생각의 나무, 2004

집필자
성신여대 산학협력단(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교수 등)
최초 주제 집필
2006. 12. 01
최초 주제 수정
2006. 12.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