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조정실과 그 소속기관의 직제」
행정조정실에서는 이산가족찾기운동 정부지원 관계부처 실무국장 회의를 개최하여 이산가족찾기운동 정부지원 실무협의회 구성(위원장 :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10개 부처 실무국장) 합의(1983.7.7)
정부는 '만남의 광장'을 통한 이산가족찾기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하고 1984년 6월 8일 정부지원 실무위원회를 개최하여 1984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그 운영을 종료하였다.향후 이산가족찾기운동에 대해한국방송공사와 대한적십자사는 '만남의 광장' 운영이 종료된 이후에도 자체계획에 따라 실시하도록합의하였다. 국무총리행정조정실에서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이산가족들의 상봉을 위해 KBS와 대한적십자사를 통한 홍보 및 공중파방송사의 지속적인 관심과 각 부처의 유·무형의 지원을 통해 분단민족의 아픔을 치유토록 했다.
한국전쟁으로 우리나라는 엄청난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입었지만, 가장 오래남은 상처는 이산가족의 문제였다. 1983년 당시 남한에만 10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산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이에 남한 내에 존재하는 이산가족들 사이의 만남이라도 우선적으로 추진해 이산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시작은 민간에서부터 있었다. 1983년 6월 30일 KBS-TV의 6·25 33주년을 기념한 특별생방송이 방송되자 전국적으로 이산가족 찾기운동이 확산되고 범국민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영상매체를 통한 이산가족찾기 특별 생방송이 방송되자 여의도에는 연일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너무 많은 인파가 여의도 광장으로 모이고 신청 인원이 폭주하자 KBS 요원들만으로는 이들을 정리, 감당할 수가 없게되 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지원대책을 협의하기에 이르렀고 1983년 7월 6일 국무총리 주재로 이산가족찾기운동과 관련하여 7개 부처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민간주도 정부지원으로 추진하되 관계부처 실무위원회를 구성하여 구체적인 지원방안을 협의토록 하였다.
여의도에 모여드는 수많은 이산가족들의 열람, 방송, 휴식 등을 위한 편의 시설을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모아지자, 여의도에 있는 산업은행 신축부지를 임시로 1년간 사용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배려하고 서울특별시로 하여금 7,200평에 ‘만남의 광장’을 착공토록 하였다. ‘만남의 광장’은 대외적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운영의 책임을 맡고, 방송은 KBS, 시설관리는 서울특별시가 맡도록 하였다.
1983년 7월 13일부터는 대한적십자사가 주관하여 7월 31일까지 전국적으로 대한적십자사 각 시·도지사, 전국 시·군·구청 민원실, 해외공관을 통해 이산가족찾기 신청을 접수토록 하고 이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주민등록표와 대조해서 보다 많은 이산가족들이 상봉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해서 이산가족들로부터 KBS와 대한적십자사에 접수된 건수는 20만 9천 여 건에 이르렀다. 접수건 중 KBS분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표제로 서울신문사에서 8천 질을 발행하여 전국 관계기관에 배포했으며, 대한적십자사도 ‘이산가족찾기 명부’라는 표제로 5,000질을 발행하여 대한적십자사 각 시·도지사와 전국 시·군·구·읍·면·동사무소에 배포함으로써 이산가족들이 거주지역에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이 명단은 각기 관련기관 컴퓨터에 입력되었다. 즉 KBS에서는 자체 컴퓨터에 입력하여 상호대조로 신속한 상봉을 도모했고, 대한적십자사도 한국과학기술원에 의뢰, 컴퓨터에 입력하여 치안본부 전자계산소와 함께 전국의 주민등록표를 대조, 이산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에 이르렀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년동안의 이산가족찾기운동으로 모두 1만 4천 9백 47건의 상봉이 이루어졌으며 이 가운데 1만 7백 19건이 KBS를 통해, 나머지 4천 2백 28건은 치안본부의 컴퓨터조회와 대한적십자사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
국무조정실,《국무조정실 30년사》, 2003